그해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연실이의 아버지에게서 여러 장의 편지가 왔다.
첫 장은 꼬리표가 다섯이나 붙어서 겨우 연실이의 지금 하숙을 찾아온 것이었다.
수년간을 한 장의 편지도 않던 딸에게 갑자기 뒤따라 편지를 하는데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다.
연실이에게 시집을 가라는 것이었다. 신랑의 나이는 연실이와 동갑, 소실의 자식이나 사람 똑똑하고 한 삼백 석내기 물려받은 것도 있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하는 것이었다.
그때 배가 남산만하게 되어 학교도 쉬고 하숙도 옮기고 있던 연실이는, 첫 편지에는 귀찮아서 자기 주소만 알리고 편지 내용에 대해서는 묵살하는 뜻으로 씁쓸히 한자도 언급(言及)치 않았다.
둘째 편지에는 그런 젖비린내 나는 아이에게 시집이 다 뭐냐는 배짱으로 답장도 안 하였다.
세째 편지는 방금 연실이가 몸을 풀은 이튿날 배달되었다. 여전히 회답도 안 하였다.
몸을 풀은 지 한 달이 지나서 외출을 할 수 있게 된 때, 연실이는 갓난애(사내애였다)의 아버지 후보자 중의 한 사람 맹호덕(孟浩德)이와 함께 어린애를 붙안고 놀러나갔다. 나갔던 길에 셋(간난아이까지)의 사진을 찍었다.
며칠 후 사진을 찾아다보니, 정녕 내외가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어때요, 맹상?”
이 말에 맹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오라범, 누이. 누이의 사생아(私生兒).”
“예끼!”
“하하하하!”
무론 이 사진은 방에 장식하든가 맹과 자기가 나누어 가지고 기념하든가 하려는 목적으로 찍은 것이 아닌지라, 의리상 맹에게 한 장 주고 자기가 두 장은 맡아두었다.
공교롭게도 사진을 찾아온 이튿날 고향에서는 또 혼사 의논의 편지가 왔다.
여기 대해서 연실이는 회답 대신으로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무언(無言)의 거절이었다. 저는 벌써 인처(人妻)요 자식까지 있습니다 하는 뜻이었다.
과연 이 사진을 보낸 다음부터는 다시 편지 왕래가 끊어졌다.
연실이는 제 이 학기 한 학기를 병을 칭탁하고 쉬었다.
제 삼 학기부터는 애는 유모 주고 다시 학교에 다녔다. 삼 학기 한 학기로 연실이도 '전문학교 졸업생'이 되는 것이었다.
김연실전 - 13. 고향에서 온 편지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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