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안나의 동경 유학 당시의 가장 마지막 애인은 I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I와의 애정이 다른 여러 과거의 애정들보다 가장 깊었다. 그런데 송안나가 아직 졸업하기 전에 I는 먼저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병나서 죽었다. 송안나는 I가 죽은 반 년 뒤에 졸업하고 돌아왔을 때는, 벌써 새 약혼자가 하나 생겨서 약혼자와 동반하여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곧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결혼을 하고 신혼 여행으로 간다는 데가 어디냐 하면 죽은 I의 고향이었다. I의 고향에서 송안나는 신혼한 남편과 함께 죽은 애인의 무덤에 절하고(사죄라 하는 편이 옳을지) 새 남편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I의 무덤에 비석을 해 세워 주었다. - 이런 뉴스였다.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자면 송안나(뿐 아니라 연실이며 명애며 다 마찬가지다)의 심리며 행동이며는 제 정신 가진 사람의 일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명애는 깔깔대며 이 뉴스를 여성이 남성에게 대한 대승리라 하여 연실이에게 알렸고, 연실이는 손뼉을 두드리며 찬성하였다.
명애의 소위 살롱이라는 것은 마루방에 유리창을 달고 '센터 테이블'을 가운데로 값싼 의자가 대여섯 대 둘려 놓여 있고, '센터 테이블'에는 재떨이 몇 개와 성냥 몇 곽이 놓여 있는 뿐이었다.
오후 세 시쯤 대여섯 명의 무리가 밀려왔다. 머리를 기르고 터키(土耳其) 모자를 비뚜로 쓴 청년, 샛빨간 노끈을 넥타이 대신으로 쌍코를 내어맨 청년, 머리를 통 뒤로 젖히고 칼날 같은 코를 때때로 이탈리아 식으로 킁킁 울리는 청년 - 동경서 사립 음악 학교를 다닌 연실이에게도 신기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소설이나 시나 한 번 활자화되기만 하면 서로 이름쯤은 기억이 될 만한 단순한 시대라, 더욱이 여자인 김연실의 이름은 그들의 기억에도 있던 바였다. 그 위에 이 집의 여왕 명애의 이름을 통하여서도 누차 들은 일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들은 두 손을 들어 환영하였다.
그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은 연실이에게도 약간 기억이 있는 사람이었다. 옷은 별다르게 입지 않았으나 가장 유행형이었다. 구주 전쟁을 겪어 세계적으로 온갖 물자가 결핍하기 때문에, 옷 같은 것도 놀랍게 짧고 좁고 팽팽한 것이 유행되어 그 유행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시절이라, 옷이 좁고 짧은 것은 흠할 것이 아니지만, 이 청년의 것은 유달리 좁고 짧아서 누가 보든 남의 것을 빌어 입은 것 같았다.
박형(薄型) 나르단 제(製)의 금시계와 꽤 커다란 금강석 반지와 밀화 궐련 물부리 등으오 부잣집 청년이라는 점이 증명되기에 말이지, 의복만으로 보자면 남의 것을 빌어 입은 듯하였다. 김유봉(金流鳳)이라는 이름이었다. 동경 미술 학교 출신이었다. 이 청년을 연실이는 짐작한다.
김유봉은 평양 사람이다. 김유봉의 증조 할아버지는 평양의 전설적 치부가(致富家)였다. 김유봉의 할아버지는 참령(參領)이었다.
이 김유봉의 할아버지가 참령 시대에 연실이의 할아버지는 군정이었다. 옛날 같으면 연실이의 할아버지라도 김유봉의 앞에 감히 앉을 자격도 없고 가까이 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연실이의 아버지도 이속(吏屬)이 되기 전에는 김 강동(강동 군수를 살았다고 김 강동이라고 한다) 댁에 하인 비슷이 드나들었다. 연실이의 아버지가 영리가 된 뒤에도 김 강동에게는 늘 하인같이 문안 다니고 하였다.
이러한 호상 관계가 있는 김유봉과 지금 대등(對等)의 자격으로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할 때에, 연실이의 마음에는 일종의 긍지까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동서 고금의 온 예술가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비판과 논란이 오르내렸다.
지금까지 자기를 여류 문학자로 자임하고 선각자로 자부하던 연실이로 하여금 적지 않게 불안을 느끼게 한 것은, 이 청년들이 떠들고 법석하는 이야기를 잘 알아듣기가 힘들뿐더러, 그들의 입에 예사로이 오르내리는 서양 문호의 이름조차도 연실이가 모르는 자가 적지 않은 점이었다. 명애의 말도 '그 작자들의 이야기는 내놓고 말하자면 잘 못 알아듣겠더라' 하더니만 연실이 자기도 그러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막연히 느끼는 바는, 연실이 자기의 학우들이던 저곳 '일본' 남녀들과 이 청년들이 전혀 마음 가지는 법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저곳 남녀들은 단지 배울 것 배우고 놀 것 놀고 먹을 것 먹는 뿐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의 마음가짐 가운데는 자기의 배운 것으로 민족을 어떻게 한다 하는 '대(對) 사회'라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김연실전 - 15-2. 살롱이라는 곳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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