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없는 인명과 수 없는 재물(財物)과 수 없는 인류의 보화(寶貨)를 삼키고 제일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다.

일본도 이 전쟁에 참가는 하였다. 하나 겨우 동양의 한구석 교주만(膠洲灣) 근처에서 퉁탕거려보고 의식적으로 불란서 전선에 군대를 약간 보내어본 뿐, 물질적으로 손해가 극히 적었다.

그 대신 이 전쟁 때문에 얻은 이익은 지극히 컸다. 지금껏 온갖 약품이며 기계를 독일서 수입하던 것이, 독일과 국교단절을 한 관계상, 자작자급(自作自給)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과학계의 발달이 놀라왔다.

유럽에서는 전쟁으로 덤비느라고 일용품조차 제 나라에서 만들지 못하는 관계상, 미국이며 일본 등에 주문하여다가 쓰게 되니만치 무역상의 이익이 놀랍게 되었다. 해운(海運)으로 굴러들어온 돈도 막대하였다. 위체(爲替) 관계로 얻은 이익도 막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적지 않은 이익의 반면에는 손해도 또한 없을 수가 없었다.

과도한 자유주의와 사치 - 이것이 가장 눈에 띄는 악영향이었다.

서양 문명의 겉물 핥기 - 이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도리우찌(鳥打帽)를 쓰는 학생이 없었고, 금단추 이외에는 쓰메에리 양복이 쉽지 않았고, 학생은 세비로를 안 입던 동경이 갑자기 변하여, 십 팔구 세만 되면 세비로 한 벌을 장만하고, 여학생들은 새빨간 '하오리'를 휘날리고 여자 양복도 드문드문 보이게 되었다.

서양 문명의 겉물을 핥는, 또 그 겉물을 연실이는 핥았다.

아무 속살도 모르는 단지 겉만 흉내내면서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이렇게 나날이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속 알맹이는 그 몇해 전 '베개를 내려오라'면 내려오던 그 시절에서 한 걸음도 진척된 바이 없었다.

조선 신문화는 대개 동경 유학생의 힘으로 건설되었고, 문화의 제일 과정은 자유연애였다.

연실이가 장차 조선에 돌아가면 건설하려던 조선 신문학(新文學)은 연실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아직 동경 유학할 동안에 싹이 트기 시작하였다. 이고주(李古周)라는 청년 문학도가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이 청년 문학도가 문학이라는 무기를 이용하여 처음 부르짖은 것이 자유연애였다.

이 현상은 연실이로 하여금 더욱 더 연애와 문학은 불가분의 것이라는 신념을 굳게 하였다.

이러한 동안에 최명애는 연실이보다 일년 앞서서 졸업을 하고 동경을 떠나게 되었다. 송안나는 최명애보다도 일년 전에 귀국하였다.

명애가 귀국할 날짜가 거의 가까운 어느날, 연실이는 명애의 하숙을 찾아갔다. 오래간만이었다. 서로 연애에 골몰할 동안은 동무를 찾을 겨를도 과연 없었다.

“아이, 오래간만이구나!”

“언니 졸업턱 받으러 왔어.”

이런 인사로써 둘은 마주앉았다.

여자들끼리 만나면 의례히 나오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한참 돈 뒤에 연실이는 이런 말을 물어보았다.

“언니, 귀국해선 무얼 하겠어?”

이 질문에 명애는 눈가에 명랑한 미소를 띠우고 잠깐 연실이의 얼굴을 본 뒤에 대답하였다.

“시집가련다.”

“시집을?”간다고?

“그래, 우스우냐?”

“턱은 대었수?”

“글쎄 누구한테 갈지 갈팡질팡일세. 돈 있는 작자는 시부모가 있구, 단간 살림은 돈이 없구. 너무 잘난 녀석은 휘어잡기 힘들구. 너무 못난 녀석은 셋샤(拙者·자기라는 뜻) 마음에 안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