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방학도 끝나고 개학이 된 지 며칠 뒤의 일이었다.
그날은 연애할 대상도 구하지 못해서 하학한 뒤에 곧 집으로 돌아오매, 그의 책상에는 우편물이 하나 놓여 있었다. 잡지였다. 뜯어보니 동경 유학생의 기관 잡지인 ×××였다.
먼첨 호에 문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노래한 시를 이 잡지에 보내어 채택이 된 연실이는, 그 다음에도 또 한 편 보냈던 것이었다. 그것이 났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연실이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즉시 봉을 뜯었다.
무식한 그 잡지의 편집인은 이번엔 연실이의 시를 몰서하여 버렸다. 그래서 목록의 아래의 이름만 읽어보아 자기의 이름이 없으므로 불쾌감이 일어나서 책을 접으려 할 때, 제목란(題目欄)에 계집 녀(女)자가 걸핏 보이는 듯하므로 다시 주의하여 거기를 보매, 거기에는,
'여자 유학생에게 경고하노라.'
하는 제목이 있었다.
무슨 이야긴가 호기심이 났다. 책으로서는 자기의 명작시(名作詩)가 발표되지 않았으므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잡지였지만, 그 제목의 페이지를 뒤적여서 펴보았다.
첫줄에서 연실이의 얼굴은 검붉게 되었다.
‘××음악학교에 다니는 모(某) 양은…’운운으로 시작한 그 글은, 연실이와 이창수와의 사이의 소위 '뒤집어씌운' 이야기를 폭로시키고, 이런 음탕한 여자가 동경에 와 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게도 물들 뿐 아니라, 더우기 고향에 계신 학부형들은 딸을 동경으로 유학 보내기를 무서워한다는 뜻을 쓰고, 이어서 이런 더러운 학생은 마땅히 매장하여버리는 것이 유학생의 의무라고 많은 '!'며 '?'를 늘어놓아 가지고 두 페이지나 널어놓았다.
읽는 동안 연실이의 얼굴은 검게 되었다 붉게 되었다, 찌푸려졌다 찡그려졌다, 별의별 표정이 다 나타났다.
읽으면서 동댕일 치고 싶었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고야 말았다. 다 읽고 나서는 드디어 동댕이쳤다.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억분하다 할까, 노엽다 할까, 부끄럽다 할까, 얼굴이며 손발의 근육이 와들와들 떨렸다. 머리로서는 아무것도 생각지를 못하였다.
한 시간, 아마 두 시간도 나마 지났겠지. 집 주인 마누라가,
“긴상 저녁 안 잡수세요?”
하고 들어올 때야 연실이는 비로소 자기의 이성을 회복하였다.
이성이라 하나 지극히도 흥분된 이성이었다.
“그만둬요.”
저녁이 입에 달지는 않을 것이므로 거절함에 있어서 이런 거절까지 않아도 좋을 것이어늘, 연실이는 이런 악의 품은 거절을 한 것이었다.
어떤 노염일까? ××음악학교에 다니는 조선 여학생은 자기밖에 없다. 그런지라, 누구든 이 글을 읽기만 하면 거기 쓰인 모(某) 양이라는 것은 자기를 지적한 것임을 알 것이다.
처녀 십팔 세(새해에 열 아홉)는 손톱눈만한 일에라도 부끄러워하는 시절이라 하나, 연실이는 요행 부끄럼에 대한 감수성은 적게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 대신 분하였다. 글자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악의(惡意)로 찬 욕을 퍼부은 것이었다. 이것이 분하였다.
어때? 그럼. 이만 뱃심이 없지 않았다. 그 글의 필자가 아직 구사상에 젖은 유치한 녀석이라는 경멸감도 물론 났다. 자유연애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듯 어리석은 소리를 흥얼거리는 숫보기라는 우월감(자기에게 대한)도 섞이어 있었다.
그런지라, 욕먹은 내용 - 사실에 대해서는 연실이는 천상천하 부끄러운 데가 없었다. 이 정정당당하고 가장 새롭고 가장 선각적인 행동을 욕하는 자의 어리석음이 미웠고, 그런 것에게 욕먹은 것이 분하였다.
두 시간 세 시간 동안을 분한 감정 때문에 몸만 떨고 있던 연실이는, 밤이 차차 들어감에 따라서 얼마만치 머리도 식어가며, 식어가느니 만치 대책도 생각났다.
김연실전 - 11-1. 여자 유학생에게 경고하노라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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