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어떤 우연한 기회에 평안도 출생의 농과대학생(農科大學生)과 알게 될 기회를 얻었다.
금년에 들어서 무척도 늘은 조선 여학생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갔던 연실이는, 거기서 그 여학생의 몇 촌 오라버니가 된다는 농학생을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나이는 스무 살이라 하나, 여자들 틈에서 몹시도 수줍어하여 이야기 한마디 변변히 하지를 못하였다.
그날 밤 하숙에 돌아와서 연실이는 여러가지로 생각하였다. 자기가 지금까지 읽은 소설 가운데서 연애하는 남녀가 처음 만난 장면을 모두 끄집어내어 가지고, 아까 그(이창수라 하였다)가 취한 태도는 어느 것에 해당할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결론으로는 퍽 내심한 청년이 몹시 연애를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도 수줍어하는 것이라 단정하였다.
자기도 그 청년을 보는 순간 퍽 기뻤다고 생각하고, 기쁜 가운데도 속이 떨렸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다른 곳을 볼 때 그 청년이 자기를 바라보면 자기는 몹시 가슴을 뛰놀리었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가슴이 이상하여 그를 바로 볼 기회도 없었다고 생각하고, 그와 함께 있는 동안은 감전(感電)된 것 같은 찌르르한 느낌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요컨대 연실이는 어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창수에게 연애를 느꼈고, 이창수 역시 자기에게 연애를 느낀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이튿날 하학한 뒤에 연실이는 이창수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찾아가려고 제 하숙을 나설 때에 발이 썩 나서지는 못하였지만, 이것이야말로 연애하는 처녀의 당연하고 공통되는 감정으로, 서양 문호(文豪)들도 모두 이 심리를 묘사한 것을 많이 본 연실이는, 이런 수줍은 감정을 극복하고 용감히 나아가는 것이 현대 신여성에게 짊어지운 커다란 사명이며, 더우기 선각자로서는 마땅히 겪고 극복하여야 할 일로 알았다.
창수는 마침 하숙에 있었다.
연실이는 창수와 함께 산보를 나섰다. 여섯 조의 좁다란 하숙방에서 속살거린다는 것은 옛날 연애지 현대 여성의 연애가 아니었다. 시부야(澁谷) 교외로 나서서 무사시노(武藏野) 숲 위로 떨어지는 낙조를 보면서 그것을 찬송하며 한숨 지으며 하여야 할 것이었다.
시부야의 신개지(新開地)도 지나서 교외로 이 첫사랑하는 남녀는 고요히 고요히 발을 옮겼다. 한 걸음 앞서서 가던 연실이가 머리를 수그린 채 뒤따르는 창수 청년을 보면 창수는 역시 머리를 수그리고, 무슨 의무라도 이행하는 듯이 먹먹히 따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남녀는 어떤 언덕마루에 가서 앉았다.
“좀 쉬어요.”
하면서 연실이가 두 사람쯤 앉기 좋은 자리에 한편으로 치우쳐 앉으매, 창수 청년은 연실이에게서 세 걸음쯤 떨어져 있는 조그만 돌멩이 위에 걸터앉았다.
연실이는 고요히 눈을 들었다. 바라보매 시뻘겋게 불붙는 낙조(落照)는 바야흐로 무성한 잡초 위로 떨어지려 하고 있다.
“선생님!”
연실이는 매우 부드러운 소리로 창수를 찾았다.
“네?”
“참 아름답지 않아요? 저 낙조 말씀이에요. 저 낙조가 형용하자면 무엇 같을까요?”
“글쎄올시다.”
농학생 이창수에게 있어서는 그 낙조는 함지박에 담긴 붉은 호박 같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형용도 좀 멋적어서 글쎄올시다 할 뿐, 눈이 멀진멀진히 낙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금 떨어질 듯 도로 솟을 듯 영화(靈火)가 하늘에서 춤을 추는 것 같지 않아요?”
“글쎄올시다.”
김연실전 - 8-5. 수줍은 농과대학생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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