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예술이라는 말, 문학이라는 말이 금시초문인 위에, 연실이의 조선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조선말을 할 줄 알고 조선옷을 입을 줄 아는 것쯤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순간 주저하였다. 그러나 일찌기 조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오랜 문화 생활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연실이는,
“있기는 있지만…”
쯤으로 막연히 응하여 두었다.
“긴상, 조선의 장래 여류문학가가 되세요. 나는 일본 여류 문학가가 될께. 이 우리 학교는 하세가와 시구레라는 여류 문학가를 낳아서 문학과 인연 깊은 학교에요. 여기서 또 나하고 긴상하고 다 일본과 조선의 여류문학가가 됩시다.”
문학소녀 도가와는 스스로 감격하여 눈에 광채를 내며 이런 말을 하였다.
연실이는 여류 문학가가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는 숫보기였다. 단 두권의 소설을 읽어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즈음 자기는 조선 여자계의 선각자라는 자부심을 품기 시작한 연실이는, 장차 여류 문학가 노릇을 해서 우매한 조선 여성계를 깨쳐주어볼까 하는 희망을 마음 한편 구석에 일으켰다.
단지 선각자라 하여도 무슨 일을 하여 어떻게 조선 여성계를 각성시킬는지 전혀 캄캄하던 연실이는, 여기서 비로소 자기의 진로(進路)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장차 배우고 닦고 하여서 도가와만큼 문학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으로써 선각자 노릇을 하리라 막연히나마 이렇게 마음먹었다.
도가와는 다시 연실이에게 스코트의 아이반호를 빌려주었다.
그러나 아닌게 아니라, 에일윈에서 받은 감격은 그것을 다 읽은 뒤에도 한동안 그의 머리에 뿌리깊게 남아 있어서, 때때로 정신없이 그 생각을 하다가는 스스로 얼굴을 붉히고 정신을 차리곤 하였다.
아이반호는 이삼 일간은 당초에 진척이 되지를 않았다. 몇줄 읽노라면 그의 생각은 어느덧 다시 에일윈으로 뒷걸음치고 뒷걸음치고 하는 것이었다.
- 아무 목표도 없이 동경으로 건너와서 아무 정견도 없이 선각자가 되리라는 자부심을 품었던 연실이는, 이리하여 도가와 모(某)의 덕으로 문학 소녀로 변하여갔다.
여름방학에도 연실이는 제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갈 그리운 집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숙사에는 북해도에서 온 학생 하나, 대만서 온 학생 하나, 연실이 이렇게 단 세 사람이 남았다.
도가와는 여름방학 동안에 보라고 꽤 여러 권의 책을 남겨두고 갔다. 그러나 이제는 독서 속력도 꽤 늘은 연실이는, 도가와가 남겨둔 책을 보름 동안에 다 보고, 그 뒤에는 도서관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해 가을과 겨울도 지나고 이듬해 봄이 된 때는, 연실이는 동경 처음으로 올 때(겨우 일년 반 전이다.)와는 전혀 다른 처녀가 되었다.
우선 자부심이 생겼다. 조선 여성계의 선각자라는 자부심이었다. 선각자가 될 목표도 섰다. 여류 문학가가 되어 우매한 조선 여성을 깨쳐주리라 하였다. 문학의 정의(定義)도 이젠 짐작이 갔노라 하였다. 문학이란 연애와 불가분(不可分)의 것이었다. 연애를 재미나고 자릿자릿하게 적은 것이 소설이고, 연애를 찬송하여 짧게 쓴 글이 시라 하였다.
일방으로 연애라는 도정을 밟지 않고 결혼하여 일생을 보내는 조선 여성을 해방(?)하여 연애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선각자에게 짊어지운 커다란 사명의 하나이라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을 널리 또 빨리 퍼쳐야 할 것이라 보았다.
문학상에 표현된 바, 전기와 통하는 것같이 찌르르 하였다는 연애와, 재미나는 소설을 읽은 뒤에 한동안 느끼는 감동도 동일한 감정이라 보았다.
즉 연애는 문학이요, 문학은 연애요,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인생 전체였다.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니라.’
스스로 창작한 이 금언(金言)을 수신책 첫 페이지에 조선 글로 커다랗게 써두었다.
김연실전 - 8-3. 조선의 장래 여류문학가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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