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심경 아래서 문학의 길을 닦기에 여념이 없는 동안 연실이는 문학과 함께 연애를 사모하는 마음이 나날이 높아갔다.
소녀 시기의 환경이 환경이었더니만치 연실이는 연애와 성교를 같은 물건으로 여기었다. 소녀 시기에는 연애라는 것은 모르고 성교라는 것이 남녀간에 있는 물건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지금 연애라는 감정의 존재를 이해하면서부터는, 그의 사상은 일단의 진보를 보여서 ‘남녀간의 교섭은 연애요, 연애의 현실적 표현은 성교니라’ 하는 신념이 들게 되었다.
그런지라, 그가 철모르는 시절에 무의미하게 잃어버린 처녀성에 대해서도 아깝다든가 분하다든가 하는 생각보다도, 그때 연애라는 감정을 자기가 이해하였더라면 훨씬 재미나고 좋았을 걸 하는 후회뿐이었다.
회상하여 그때의 그 사내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장 표준형의 기생 오라범으로, 게으름과 무지와 비열을 합쳐놓으면 이런 덩어리가 생길까 하는 생각이 들 만한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연실이에게는 손톱만치도 마음가는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학 즉 연애요, 연애와 성교는 불가분의 것으로 믿는 연실이는, 그때 연애적 감정이 없이 그 사내를 가까이 한 것이 적지 않게 분하였다. 한번 함께 산보(이것이 초보적 행동이었다)도 못하고, 함께 달을 쳐다보며 속살거리지도 못하고, 이렇듯 어리석고 어리던 자기가 저주스러웠다.
그 봄(열일곱 살이었다)에 연실이는 <동경 유학생>이란 잡지에 시를 한 편 지어서 보냈다.
문을 닫아도
들어오는 月光
사랑은 月光이런가
月光은 사랑이런가
아아, 二八處女의
가슴이 떨리도다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쓰고 하여 겨우 이렇게 만들어서, 한 벌은 고이고이 적어서 가방에 간수하고, 한 벌은 잡지사에 보냈다.
봄방학 때쯤 발행된 그 잡지에는 연실이의 시가 육호 활자로나마 게재가 되었다.
지금 그는 여명기의 조선 여성에게 있어서 한 개 광휘 있는 별이라는 자부심을 넉넉히 갖게 되었다. 그 잡지 십여 권을 사서 자기의 본집과 그밖 몇몇 동무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문학의 실체(實體)인 연애를 좀더 알기 위하여 엘렌 케이며 구리가와 박사의 저서(著書)도 숙독하였다.
새 학기에는 기숙사에서도 나왔다. 기숙사에서도 학생들끼리 동성의 사랑도 꽤 농후한 자도 있었지만, 연애라는 것은 이성에게라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연실이는 그것을 옳게 볼 수가 없고, 또는 자기가 몸소 나아가서 연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숙사는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여자 유학생 친목회에도 자주 나갔다. 작년 입학한 직후 첫 회합에는 단순한 처녀로 한 얌전한 규수로 참석하였지만, 차차 어느덧 자유연애와 자유결혼(이것이 여성해방이라 보았다)을 가장 맹렬히 주장하는 열렬한 회원으로 변하였다.
이론 방면으로 이만치 진보된 만치 실제로도 또한 연애를 하여보려고 기회 포착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동경 유학생간에는 남녀가 함께 회집할 수 있는 곳은 예수교 예배당밖에 없고, 남학생과 여학생간에 교제가 그다지 성행치 못하던 때라, 기회 포착이 쉽게 되지 않았다.
여류 문학가가 되어서 선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연애의 필요를 느끼는 연실이는, 이 좀체 포착되지 않는 기회 때문에 초조하게 지냈다.
김연실전 - 8-4. 문학은 바로 연애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페이지 16 / 전체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