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연실이는 창수의 방에서 묵었다. 그 하숙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역시 연실이는 적극적으로 창수는 소극적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다가, 교외 전차가 끊어졌음을 핑계로 연실이는 거기서 밤을 지내기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묵겠다는 말은 차마 하기가 힘들었지만, 선각자는 경우에 의지하여서는 온갖 체면이며 예의 등, 인습의 산물은 희생하여야 한다는 신념 아래서,
“아이, 전차가 끊어져서 어쩌나? 선생님 안 쓰는 이부자리 없으세요?”
하고 말을 던져서, 요행 여름철이라 안 쓰는 두터운 이부자리를 얻어서 육조 방에 두 자리를 편 것이었다.
자리에 들어서도, 인생 문제며 문학의 존귀성을 이야기하면서, 연실이는 차츰차츰 뒤채고 뒤채는 동안, 창수의 이불 아래로 절반만치 들어갔다. '그것'까지 실행이 되어야 연애의 성립을 인정할 수 있는 연실이었다.
이튿날 아침 창수가 연실이에게, 자기는 고향에 어려서 결혼한 아내가 있노라고 몹시 미안한 듯이 고백할 때에, 연실이는 즉시로 그 사상을 깨뜨려주었다.
“그게 무슨 관계가 있어요? 두 사람의 사랑만 굳으면 그만이지, 사랑 없는 본댁이 있으면 어때요?”
명랑히 이렇게 대답할 때는, 연실이는 자기를 완전히 한 명작 소설의 주인공으로 여기었다.
그 하숙에는 창수 외에도 조선 학생이 두 명이 있었다. 연실이가 돌아간 뒤에 한 하숙의 다른 학생들에게 놀리운 창수는, 변명으로 아마,
“뒤집어씌우는 걸 할 수 있나?”
이렇게 대답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유학생에게 연실이의 이름이 높아지고, 그 위에 뒤집어씌운다 하여 거기서 일전하여 감투장수라는 별명이 며칠 가지 않아서 오백 명 유학생간에 쪽 퍼졌다.
그러나 이런 소문은 있건 말건, 연실이는 환희와 만족의 절정에 올라섰다.
첫째 선각자였다.
둘째 여류 문학가였다.
셋째 자유 연애의 선봉자였다.
문학가가 되고 선각자가 되기에 아직 일말의 부족감을 느끼고 있던 것이 자유 연애까지 획득하여놓으니 이제는 더 없는 구슬이었다.
어디를 내어놓을지라도 - 선진국 서양에 갖다놓을지라도, 축 박힐 데가 없는 완전무결한 신여성이요 선각자로다! 연실이는 의심치 않고 믿었다.
아직도 그래도 좀더 희망을 말하자면, 창수가 좀더 적극적이요 정열적이요 '뒤집어쓰는 편'이 아니고 끌어당기는 편이면 하는 것이었다.
이 연애에 승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실이는 지금껏 다니던 학교에 퇴학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립 음악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음악이 예술인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학교가 동경에서 유명한 연애학교(남녀 공학)인 까닭이었다.
김연실전 - 8-6. 뒤집어씌우는 걸 할 수 있나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페이지 18 / 전체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