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인생이라 하는 것을 커다란 키(箕)에 담아 가지고 끊임없이 키질을 한다. 그 키질로써 가라지, 죽데기, 껍질, 먼지 등은 날려버리고, 알맹이만 따로 추려낸다.

너무도 급격히 수입된 신문화의 선풍과, 그때 때를 같이하여 전개된 대경기(大景氣)의 덕택으로 생겨났던 가라지며 죽데기는 이 키질에 모두 정리되었다. 세계적으로 이르렀던 대경기의 반동으로 온 세계는 전고 미문의 불경기 시대를 현출하였다. 큰 회사 큰 재벌들이 폭폭 넘어지고 파산자가 온 세상에 충일되었다.

불경기는 자숙(自肅)을 낳는다. 한때 경기에 생겨났던 부박한 세태와 경표한 풍조는 한꺼번에 쓸리어나갔다.

신생 조선 문학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금전의 여유가 있어서 자연 출판계가 흥성하였고, 그 덕에 어중이 떠중이가 모두 주판을 던지고 망치를 던지고 붓대를 잡았었는데, 한풀 꺾인 다음에는 그들은 다시 예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에 하나이 겨우 이 키질에도 자기의 명맥을 보존하였지, 나머지의 대부분은 좀 우(優)한 자는 신문기자로, 그에 버금한 자는 광고 문안자(廣告文案者)로, 또 그 아래로는 과거 대경기 시대에 몇 번 제 이름이 활자화해 본 것을 연줄로 억지로 그냥 매달려 있는 사람으로 - 이렇듯 그냥 붓대를 잡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각기 제 재분에 따라서 새 직업을 따라갔다.

그런 가운데서 연실이는 '여류문사'라는 특별한 지위의 덕으로 그냥 문사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는 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처음의 여류문사로, 연실이의 이름은 하도 크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한 개의 작품 행동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리통에도 그냥 남아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경제상의 압박은 피할 수가 없었다. 연실이는 아직껏 경제 곤란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언제 누구가 어디서 주는지는 자기로도 기억이 흐리지만, 언제든 주머니에는 여유가 있었다.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외에, 또 필요한 물건은 어디서 언제 생기는지 늘 저절로 부족을 모를 만치 준비되어 있었다. 물질상의 곤란이라는 것이 존재한 줄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이러다가 갑자기 생전 처음으로 경제 곤란이라는 것에 직면하니, 어찌해야 될지 전혀 도리가 생각나지를 않았다. 온갖 사물에 대해서 지극히 감수성이 둔한 연실이도 현실의 경제 곤란에 직면해서는 갈팡질팡하였다.

경기 좋은 시절에는 그 살롱에는 늘 청년들이 우글우글하였고 경제 곤란을 모르고 지냈는데, 불경기 선풍이 불자, 살롱이 차차 적막해갔고, 동시에 연실이의 주머니도 가벼워갔다. 간간 일 환, 삼 환, 오 환 등 생기기는 하였지만, 이런 부스럭 돈으로는 생활비가 되지를 않는다.

주인집의 하숙비를 한 달은 잊어버린 체하고 거저 넘겼다. 매일 대문을 드나들 때마다 채근 받는 것 같아서 간이 조막만하게 되고 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만에 종내 채근을 받았다.

빚 채근이 평생 처음인 연실이는 저녁때 드리마 하고 그냥 나왔다.

저녁때라도 돈이 생길 까닭이 없었다. 저녁때까지 이 동무 저 동무네 집에 일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저녁때도 하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느 동무네 집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은 역시 갈 데가 없어서 식전 새벽에 명애네 집을 찾아갔다. 명애는 유봉이와 갈려서 다른 사람과 동서하는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