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실이는 평양서 열흘도 못 있고 도로 서울로 올라왔다.
평양에는 아버지, 적모 다 작고하고, 오라비동생(이복)도 하나만이 아내를 얻어 가지고 순사를 다니고 있었다.
연실이가 행색이라도 좀 나았으면 그래도 좀 대접이 달랐을지도 모르나, 간신히 거지나 면한 듯한 꾀죄죄한 꼴로 들어서고 보니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진실로 불쾌하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면 도리어 나을 것이다. 제 손아랫 사람에게 마치 거지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간신히 열흘을 참다가 도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튿날로 곧 돌아서고 싶었으나 불행히 차비가 없어서 못 떠나고 있다가, 길에서 옛날 동무를 만나서 염치를 무릅쓰고 동냥하여 차비를 마련해 가지고 떠나노라는 말도 않고 나와버렸다. 평양 내려갔던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동무에게 십 원을 꾸어서 차비를 쓰고, 오륙 원 남은 것을 신주와 같이 귀중히 품고 경성에 다시 발을 내려놓을 때는 눈앞이 아득하였다.
어찌하랴?
그 옛날 커다란 포부와 희망을 품고 동경서 이곳으로 돌아올 때는 얼마나 희망과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던가!
그 뒤 수년간 조선 유일의 여류문학자로 이 땅을 활보할 때에, 이 땅은 얼마나 아리땁고 향그러웠던고!
겨우 수 삼 년 전의 일이다.
같은 땅 같은 사람이다. 그렇거늘… 천만의 발이 활기 있게 걸음을 재촉하는 길바닥을 풀이 없이 걸었다.
안잠이라도 자리라. 부엌데기라도 되리라. 동냥만은 결코 안 하리라. 더우기 동기네 집의 신세는 안 지리라.
그 사이 열흘 오라비네 집에 있으면서 연실이는 쓴일 단일 마다 하지 않고 다 하였다. 남의 집에서 그만치 시중해주었으면 치사 받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렇거늘 동생네 집에서는 일에는 공이 없고 받은 신세는 자세가 된다. 그만큼 속을 쓰고 마음을 쓰고 몸을 쓰면, 왜 배가 고프고 옷이 남루하랴? 내 배를 내가 채우리라. 내 몸을 내가 장식하리라.
동생네 집 열흘에서 갖은 수모 다 받은 연실이는 다시 상경해서 하인살이를 해서라도 독립하여 살고자 굳게 결심하였다.
우선 셋방 하나를 얻어서 몸둘 곳을 장만하고, 그 뒤 직업(음악 개인 교수나 일어 교수쯤의 좀 고등한 직업에서 안잠자기, 찻집 등의 낮은 직업에 이르기까지 피하지 않고 다 닥치는대로)을 구하려고 차표를 역부에게 주고 그 뒤는 오륙 원의 돈과 몸에 걸친 남루한 옷 한 벌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조촐한 몸을 백만 장안으로 끼어들은 것이었다.
집세가 헐한 **동 근처로 찾아갔다. '복덕방'이라는 휘장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들치고 들어서면서 주인을 찾았다.
매달 한 삼 원짜리 삭월세의 방 하나를 -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몹시 서툴었다. 복덕방 주인은 사십 내외쯤 되는 중늙은이었다. 그는 이 하이칼라 같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한 여인을 위 아래로 훑어보면서 동저고릿바람으로 나섰다.
연실이는 집주름의 뒤를 따라서 묵묵히 걸었다.
가면서 생각하였다. 중개인이 몹시 낯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였다.
“방은 한 달에 삼 원이지만 석 달 월세를 깔아야 합니다.”
중개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나 웬 까닭인지 중개인의 뒷모습에 몹시 흥미를 일으키고,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욕구 때문에 그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방은 보았다.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도 똑똑히 안 보았다.
그날 밤, 이 초라한 행색을 쉴 곳도 없어서 경성역 대합실에서 밤을 보내다가, 연실이는 문득 아까 그 중개인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김연실전 - 24-1. 거지같은 대접을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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