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환오는 더럭 겁이 났다. 단골 승객인 청년도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을 모르다니 워낙 난장판 속이라 깜박 그걸 까먹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승무원의 내왕도 거의 불가능한 상태여서 누구 하나 책임지고 그걸 대답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쩌면 이미 만종을 지났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평을 지난 뒤로 그는 아직 한번도 정거장 플랫폼의 불빛을 보지 못했는데 정말 만종을 그냥 지나쳐버렸다면 큰일이었다. 환오의 이런 조바심과는 달리 여타 승객들의 표정은 너무 태평스럽고 여유작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노래부르고 지껄이고 끼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환오의 기억에 따르면 그사이 열차가 몇차례 정차했던 것 같고 기적소리를 몇번 들었고 터널을 지나고 또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터널은 이 중앙선 역구간의 어디에나 빠뜨리지 않고 골고루 끼어 있기 때문에 그 기억으로는 지금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이미 만종이 지난 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하, 손님.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건 없다구요.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 기차는 굼벵이라구, 지가 기껏 달렸어야 구둔 아니면 양동일 거요.
이렇게 말한 작업복 청년은 차창 밖을 내다보려고 차창 쪽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한참동안 창밖을 들여다보던 청년은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제자리로 돌아섰다.
안 뵈는데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이따가 차가 서보면 곧 알겠죠. 걱정할 건 없다구요.
객차 구석의 여인들이 아직도 그녀들의 흥겨운 가무를 계속하는 바람에 바로 옆에서 하는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차간은 소란했다. 그녀들의 노래라는 것은 고작해야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혹은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따위를 개미 쳇바퀴 돌듯이 되풀이하는 것이었지만 여인들은 조금도 싫증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난 차라리 이놈의 기차가 영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줬으면 좋겠다구요. 가는 데까지 가보면 끝장이 나는 때가 있겠죠.
춤추는 여자들을 흘겨보던 작업복 청년이 몹시 부아가 치미는 듯 말했다.
형씨는 왜 차중에서 그런 불길한 소릴 하죠?
아뇨. 정말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이 기차를 타고서 그런 생각 한번쯤 안해보는 게 도리어 이상하죠. 난 암담해서 그래요. 아까도 말했지만 동화에 가봐야 빤하다구요. 웬일인지 재작년부터 과수들이 하나둘씩 말라서 죽어가요. 시골 공기가 탁해서 그러는지 농약을 잘못 사용해서 그러는지 아무튼 아무리 애써도 농원이 점점 황폐해가구 있다 이겁니다.
그런 황무지에서 오래 견뎌봐야 남는 것은 썩은 대가리에 빈주먹뿐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도시에 가보면 이건 더해요. 몽유병자들이 골목골목마다 득실거리는 통에 발붙일 곳도 물론 없지만 그보다도 숨이 막힌다 이거요. 내가 아까부터 선생을 주목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 기로에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고 싶었던 거라구요.
작업복 청년이 이렇게 나오자, 환오는 사뭇 입장이 난처했다. 그는 우선 청년이 자기에게 무엇인가 무리하게 기대하고 있다는 데 당황했고 청년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얼핏 포착할 수 없어서 쩔쩔맸다.
잠시 후 환오는 곧 그것을 깨달을 수는 있었지만 이처럼 발붙일 곳이 없도록 초만원을 이룬 혼잡한 차중에서, 거주지 선택에 관한 일가견을 피력한다는 게 도무지 우스꽝스런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좌석 하나 차지하지 못한 자기 주제로는 더욱 그런 느낌이 앞섰다. 하지만 환오의 이런 기분에는 아랑곳없이 작업복 청년은 환오의 입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엉뚱한 얘기겠지만 난 이 기차가 만종까지 무사히 가줬으면 해요.
환오는 얼떨결에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일자리를 구경하려고 형씨가 말하는 그토록 황폐한 지방으로 가고 있죠. 하필 왜 그런 곳이냐고요? 지난 초봄부터 일년 내내 구해봤지만 결국 그곳에 가보라는 소개장 하나밖에 구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난 만종까지 무사히 가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작업복 청년은 깜짝 놀란 듯 휘둥그래진 눈으로 환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난 단언해요. 틀림없이 환멸끝에 돌아오고 말 거요. 그쪽에 뭔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면 오산이죠. 아무것도 없으니까.
청년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마구 흥분해서 부르짖었다.
난 보물 찾으러 가는 건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뭡니까? 어떤 사명감 때문입니까?
그런 건 더욱 아니죠.
그렇다면 더욱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나더러 이 기차 속에서 살라는 겁니까?
그럴 수는 없죠. 더구나 이렇게 도떼기시장처럼 너저분한 삼등 열차에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