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무어 재미있는 게 있소?
중사가 밑에서 다시 물었지만 역시 순열씨는 대답하지 못했다. 막상 그가 멀리 빨갛고 검은 기와지붕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을 보았을 때 그는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그것은 어렸을 때 남의 집 담장을 기어올라가 몰래 뒤란을 훔쳐보고 있을 때 느끼던 불안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는 이 불안 때문에 좀더 오래 그 마을의 정경을 지켜보지 못했다. 여전히 다리가 덜덜 떨렸고 그 떨림은 지금 철창 밖의 복도에서 근무자 중의 누군가가 그의 하반신을 노려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리고 그런 가능성 때문에 2호의 동료들이 불안하게 그의 거동을 지켜보리라는 생각을 새삼 불러일으켰다. 그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곧 바닥으로 내려서고 말았다.
그보쇼. 외출하고 나면 항상 그 모양이라니까.
순열씨가 말없이 뒷구석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자 중사가 말했다. 그는 방금 바닥에 내려온 순열씨의 얼굴에서 역시 어두운 그늘을 발견한 것이다.
우린 말요. 보지 않고 지내는 게 건강에 이롭단 말요. 내가 저 녀석들의 외출을 허락지 않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거요.
2호의 동료들은 그의 말을 수긍하는지 아니면 부정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벽에 기대어본다든가 허리를 펴고 평좌로 앉아 본다든가 그 어느 것에도 싫증이 난 듯 무릎을 세우고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되게 참지 못하는군.
중사는 혼자서 지껄이고는 벌떡 일어나 철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철창 문 바로 위에 꽂혀 있는 휴지통에서 <새 시대에 맞는 성경> 두 페이지를 꺼내들고,
2호 일명 소변.
하고 가볍게 소리쳤다. 그가 돌아서서 변소 앞으로 다가설 때 정철훈 하사는 얼른 자기 다리를 두 손으로 만지면서,
드릴까요?
하고 말했다.
있어?
네.
몇 마리나……?
두 마리뿐입니다.
겨우 고거야?
네.
애연가가 늘어나니까 조달이 큰 문제로군. 가만있어. 이따 1호로 연락해보자. 이번엔 난 참겠어.
그는 빈손으로 그냥 변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변을 보러 가면서도 휴지를 들고 가는 짓은 하나의 습관이었다. 변소에는 흡연자의 부주의로 담뱃재나 필터의 가닥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치우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것을 미처 치우지 못한 사이에 갑자기 변소 검열을 받게 되면 그야말로 2호는 볼장 다 보기 때문이다.
중사가 변소 문을 열고 나오자 이번에는 순열씨가 철창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휴지통에서 <새로운 시대의 성경> 두 페이지를 꺼내들었다. <새로운 시대의 성경>이란 성경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한 조그만 책자로 매우 열성적인 신흥교파의 선교부로부터 배부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그들은 읽기도 했지만 그 기간은 배부를 받은 뒤의 이삼 일에 불과했다. 이삼 일이 지나면 감방장은 휴지를 마련하기 위해 그 작은 책자들을 모두 뜯어서 네 겹으로 접으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휴지를 꺼내던 순열씨는 철창 앞에 잠시 부동으로 섰다. 이런 때에는 반드시 근무자의 눈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는 언젠가 배운 일이 있었다. 근무자가 지켜보는 순간에 바로 신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고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열심히 근무자의 눈을 찾았으나 장 수병님과 교대한 이광일 수병님은 지금 7호 앞에서 7호의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주목을 도무지 받을 수가 없었다.
2호 일명 변소.
그는 얼떨결에 이렇게 소리치고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와 눈이 마주친 2호의 동료들이 모두 소리를 내지 않고 웃고 있었다. 단지 정철훈 하사만이 무언지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보, 변소가 뭐요?
잔뜩 부르튼 얼굴로 정 하사가 묻자, 순열씨는 선 자리에서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정 하사는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마음껏 눈을 부라려 그의 앞에 서 있는 마르고 나이든 사나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눈이 일단 상대를 노려보자, 이렇게 흉악하고 위압적인 얼굴이 된다는 걸 순열씨도 처음 알았다. 그의 주름진 이마, 까만 눈썹 밑에 상대를 그만 태워버릴 듯이 타고 있는 커다란 눈, 그리고 노기로 부르튼 위아랫 입술,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얼굴은 분명 호랑이의 상을 본뜬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