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으로 통풍구의 창틀을 꽉 붙잡고 선 중사는 밑에 서 있는 순열씨를 내려다보고 한번 씨익 웃었다. 아래서 보니까 웃을 때 드러나는 중사의 왼쪽 뻐드렁니가 순열씨에게는 유난히 크게 보였고 그 노오란 이빨은 언젠가 그가 화면에서 본 일이 있는 어떤 야수의 그것과 흡사해 보여 순열씨는 흠칫 놀랐다. 저 귀여운 웃음 속에 저토록 사나운 이빨이 숨어 있었구나.
중사는 자기가 선 기반이 튼튼한가를 시험 하느라고 두세 번 발을 굴렀다. 중사의 발은 비록 혈색이 깡그리 바래져 얼핏 죽은 자의 발처럼 싯누렇게 떠보였으나 골격은 매우 넓적하고 굵어서 우람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나운 발이 자기의 어깨를 밟고 거침없이 두세 번 굴렀건만 하사는 얼굴을 찌푸리거나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고 그냥 표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서 있었다.
선생, 해가 보인다니까.
중사는 어린애처럼 한쪽 팔을 휘두르면서 즐겁게 소리쳤다. 2호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소리에 갑자기 깨어난 듯 통풍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양쪽 벽을 따라 늘어앉아 있는 그들은 무언가를 체념한 듯 이내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닫고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다.
지금 버스가 스톱했다. 이제 곧 떠날 게다. 암 으흥, 벌써 떠나는구나.
중사는 변사처럼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혼자서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문득 천명오의 곁에 엉거주춤 서 있는 순열씨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선생, 거기서 저 나무가 보여요?
그가 통풍구 바깥을 손으로 가리켰으나 순열씨의 위치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요.
참, 혼자 보기 아깝구나. 저 잎사귀들 좀 봐. 푸릇푸릇한 잎사귀들, 한창이구나. 며칠 사이에 저렇게 됐어.
중사는 자못 감상적인 투로 혼자 지껄이고는 통풍구의 창틀에 턱을 괸 채 한참동안 말없이 바깥만을 향하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가 외출을 끝내고 천명오의 어깨 위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을 때는 중사의 얼굴에선 장난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2호의 동료들은 그가 자기의 집을, 자기의 마누라를, 그리고 그의 재소 중에 태어났다는 자기의 딸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얼른 알아차렸다.
여보, 박형, 박형도 외출 한번 하고 싶소?
땅에 내려선 중사가 말하자, 순열씨는 얼핏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그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이 맴을 돌고 있었다. 그는 중사가 떠들어대는 소리로 해서 비로소 자기는 금년의 유월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깨닫자 갑자기 그 유월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중사의 제의에 놀라는 동료들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그는 곧 자기의 충동이 사라지는 걸 깨달았다. 그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중사는 자기 쪽에서 선뜻 결정을 내렸다.
이봐, 천 하사, 선생님을 위해서 한번 더 수고를 해야겠어.
이미 제자리에 돌아가 평좌로 앉아 있던 천명오는 다시 벌떡 일어나 뒤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하긴 나도 일 년이 넘도록 외출은 꿈도 못 꿨지.
중사는 불만을 감추고 묵묵히 앉아 있는 동료들의 굳어버린 얼굴들을 어루만지듯 말하고는 이렇게 감방의 질서를 깨뜨려보는 것도 일견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이 한참 혼자서 껄껄대고 웃었다. 천명오는 기계와 같은 동작으로 금방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벽에 등을 딱 붙이고 두 손에 힘을 모아 깍지를 끼운 그의 표정은 뜻밖의 사나이를 모신다는 데 대한 불쾌감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중사를 위해서만 봉사해왔었다. 그렇지만 이제 중사의 지시라면 상대가 누구이건 즐겁게 손깍지를 끼울 수 있다는 듯이 다만 그 큰 눈을 껌벅거리며 순열씨가 오르기만을 기다렸다.
올라가시우, 나중엔 뒈지게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으니까.
순열씨는 가까스로 자기의 오른쪽 발을 하사의 손깍지에 올렸다. 몸을 올리느라 그의 손을 힘껏 밟으면서 그는 이 사나이가 별안간 그의 몸뚱이를 저 시멘트 바닥으로 동댕이질치지 않을까 하고 겁을 냈다. 하사의 새까맣고 우락부락한 얼굴은 언제고 그럴 수 있는 폭력을 감추고 있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중사가 곁에서 엉덩이를 힘껏 밀어올리는 바람에 순열씨는 단숨에 하사의 어깨 위에 올라섰다. 그가 허리를 길게 펴자 천정 밑에 있던 통풍구가 그의 얼굴 앞에 다가왔다. 그는 통풍구의 창틀을 두 손으로 힘껏 부여잡고 얼굴을 바깥으로 내어밀었다.
뭐가 보입니까?
이때 밑에서 중사가 다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으나 순열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비록 천 하사가 아주 튼튼하게 믿음직스럽게 밑에서 받들어 주고 있다고는 해도 우선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그런 연유로 그의 시야도 몹시 불안했다.
푸릇푸릇한 잎사귀를 찾아보자라고 그는 먼저 생각했다. 그의 코로 스며드는 유월의 공기는 확실히 상쾌했다. 그는 이윽고 푸릇푸릇한 포플라 나무의 잎사귀들이 유월 저녁나절의 햇빛에 반사되어 그 무수한 배때기들을 번쩍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게 바로 벽을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었구나. 그는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얼른 시야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포플라 나무들이 서 있는 부근에는 사령부 영내를 구분하는 철조망 바리케이드가 커다란 구렁이의 허물처럼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 바리케이드 건너에는 미군부대의 거대한 조달창들이 눈앞을 가로막을 듯이 널따란 지역을 차지하고 늘어서 있었다. 그는 얼른 조달창의 뾰족한 지붕 건너편으로 시선을 들어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자 했던 대상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