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이게 그 이야기의 전제로서 필요했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그냥 이걸 생략해버리고 연애 이야기로 들어간다면 다음 이야기에서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왜 일을 그렇게 처리했을까에 대해서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그러는 겁니다.

 

그는 방금,

 

그게 연애 이야기요?

 

라고 사뭇 퉁명스레 질문을 던진 하사의 존재를 계산하고부터 이렇게 부연했다. 그렇지만 그가 지금 자기의 이야기를 과연 듣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지금 변소 옆에 바싹 붙어앉아 있고 그곳은 무리지어 앉아 있는 이쪽에서 몇자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은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순열씨는 그의 질문에 한마디도 부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지는 못했다.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순열씨는 곁에 있는 중사의 얼굴을 향해 다시금 말했다. 중사는 입을 비틀고 비쭉 웃어보였다. 두터운 아랫입술을 삐뚜름히 내밀고 그가 소리 없이 웃을 때는 귀여운 느낌마저 주었다. 하여튼 그의 얼굴이 평온한 채로 있을 때는 얼굴에서 이따금 어린애의 얼굴을 발견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감방장의 권위를 찾기 위해 표정을 일단 딱딱하게 만들거나 또는 누구에겐가 고함을 지르거나 발작적으로 주먹 혹은 발길을 휘두를 때는 그 귀여운 웃음이나 어린애의 얼굴은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무서운 얼굴이 저토록 귀엽게 표변하는 데 대해 순열씨는 내심 몹시 감탄하고 있었다. 빨리 하슈라는 듯이 중사는 지금 그 귀여운 웃음을 보내주고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 때문에 어느 날 나는 한강 백사장을 찾았지요. 아마도 여름 휴가였을 거요. 굉장히 뜨겁고 무더운 날이었으니까. 한강 백사장은 끝없을 만큼 넓어요. 한남동에서 철로가 있는 둑으로 올라가보면 거기 사장이 얼마나 넓어 뵈나 단숨에 알지요. 옳지 되었다, 하고 우리집 마루에 앉았을 때 생각한 겁니다.

 

뭘 말요?

 

참지 못해 중사가 물었다.

 

들어보슈.

 

순열씨는 귀여운 고참자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한 장소에 오래 서서 살을 태운다는 것은 일종의 형벌 아니겠소? 그러니까 좀처럼 그짓을 감행한다는 건 어려웠단 말이죠. 그런데 이 넓은 백사장을 걸어간다면,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백사장을 끝없이 하염없이 걸어간다면, 너무 빨리 걷지 않고 조금 천천히 걸어간다면, 물론 하늘을 보고, 그러면 멋들어진 산보와 살 그을리는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 우리 집 마루에 앉았을 때 떠오른 겁니다. 나는 그길로 한강 백사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백사장에서 산보했다는 얘기는 생략하죠. 내가 멋들어진 산보를 했건 말건, 혹은 거기서 진짜로 살을 태울 수 있었건 역시 태우지 못했건 그건 별로 관련이 없으니깐.

 

하여튼 두 시간쯤 사장에서 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시간은 오후 두세 시 무렵, 해가 제일 뜨거운 때였죠. K동의 언덕배기를 걸어 올라와 한숨 돌리고 비교적 평평한 한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걸어왔소. 주위는 주택가였는데 모두 새로 들어선 집들이어서 비교적 집들이 깨끗했지요. 그래서 난 그 마을을 신흥촌이라 불렀지요.

 

그러니까 그 신흥촌 입구를 막 들어선 참에 맞은편에서 누가 온 겁니다. 흰 옷을 입어서 햇빛의 반사 때문에 처음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다가 점점 가까워지니까 윤곽이 드러납니다. 나는 햇빛 때문인지 또는 다른 무엇 때문인지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내 앞에 바싹 다가올 때까지 그게 그토록 예쁜 처녀라는 걸 느끼지 못했지요. 아니 그게 그토록 예쁜 여자였기에 내 눈이 어릿어릿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녀가 바싹 내 앞에 다가왔을 때에야 나는 그 여자가 참말 예쁜 여자라는 것, 마치 숲에서 나온 요정처럼 예쁜 여자라는 것, 당신들 영화에서 요정을 보았겠지만 팔등신이 아니면 얼굴이 제아무리 예뻤댔자 요정으로 보이지는 않는 법이요. 그 여자는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곱고 늘씬했소.

 

내가 그걸 깨닫고 너무 충격이 커서, 하필이면 백사장의 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에 행인 하나 없는 한길에서 딱 둘이서 마주쳤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이 커서 머리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을 때는 때가 이미 늦어버렸소. 그녀는 잽싼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간 거요. 물론 때가 늦지 않았던들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곧 뒤로 돌아섰는데 그녀가 계속 걸어가면 미행할 참이었죠.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미행해서 그녀가 어디 사는 누구라는 걸 알아두는 것뿐이었으니까. 일단 그걸 알고 난 뒤에 차츰 방법을 생각해야 되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몇 걸음 더 걷지 않아서 바로 길가에 있는 어떤 집의 대문 앞에 서는 것이었소. 나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소. 그렇지만 그녀는 나를 느끼지 못했는지 뒤쪽의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대문의 벨을 눌렀소. 참 하얗고 포동포동 살찐 손이었죠. 찌이 찌이 벨소리가 울리고 이어서 집안에서 누군가 신발 끌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인제 오니?

 

응.

 

하는 콧노래 같은 가벼운 문답이 들린 뒤에 문이 열렸소. 거기까지밖에는 기억이 안 나요. 문이 언제 열렸는지 그녀가 언제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는지 얼떨떨한 기분이라 도무지 느끼질 못했거든요. 하여튼 그 여자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거요. 그러니까 처음 눈앞에 나타나서 사라질 때까지 불과 몇초 걸린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