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은 갑자기 중사가 미쳤나 하고 휘둥그래진 눈으로 중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거역하지 못하고 침구 곁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편지지나 연필 따위는 평소에 침구 속에 감춰놓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 침구 속을 뒤지고 있던 정철훈은 그냥 빈손으로 다시 돌아섰다.

 

종이는 있지만 연필은 총장이 가져갔습니다.

 

그 새낀 왜 자꾸 남의 것을 가져가지? 그 새끼더러 연필 돌려달라구 해.

 

총장이 취침 전에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정철훈은 몹시 딱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총장이 그렇게 말했다면 총장이 돌려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이 중사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씨팔 모처럼 시 구경 좀 할까 했더니!

 

그는 순열씨에게 이따 쓰시오. 이따. 여기가 낙원이라구? 히히 그 제목 재미있구먼 하고 말했다.

 

순열씨는 절반쯤 타들어가는 궐련의 매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허용된 자기만의 시간은 바로 그 매듭까지였다. 그는 머릿속에 떠돌았던 잡념을 뿌리치듯 지워버리고 한바탕 심호흡을 했다. 그는 다음 차례인 중사를 위해 불을 끄지 않은 채 남은 궐련조각을 높은 벽에 파인 홈에 꽂아놓고 변소를 나왔다.

 

 난 이 새끼들이 요즘 발랑 까졌다는 걸 알고 있어. 오태봉 이 새꺄.

 

이죽거리며 웃고 있던 중사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방금 변소에서 흡연을 하고 나온 오태봉은 영문을 몰라 중사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천 하사 들어가.

 

그는 변소에서 타고 있을 담배를 생각하고 얼른 지시를 내린 다음 다시 오태봉을 노려보았다.

 

넌 이새꺄 변소에서 뭘 꾸물거리는 거야, 너 공주를 범했지?

 

아닙니다.

 

오태봉은 황급하게 부인했다.

 

이 새끼, 범했으면 범했다고 해. 너 변소에서 지금 공주를 범했지?

 

아닙니다. 거긴 보지두 않았어요.

 

뭐야 이 새끼, 그렇다면 박어.

 

오태봉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바닥에 꽂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었다. 그는 몇 번 꼬꾸라질 듯 비틀거렸지만 곧 두 팔을 허리에 두르고 똑바로 박아 자세를 취했다.

 

이 새끼들은 내가 인심을 써도 몰라준다구.

 

그는 아침에 총장이 백양 다섯 개비를 새로 구입해 주었기 때문에 오래 차례를 거른 동료들에게 고참순으로 인심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오태봉은 변소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 새끼 얼굴이 요즘 자꾸 노오래지는 게 수상쩍지? 그지?

 

하고 중사는 정철훈에게 동의를 구했다. 정철훈은 빙그레 마주보고 웃고는 끙끙거리는 오태봉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새꺄 어따 대고 용두질야, 아직 피도 안 마른 새끼가 감히 데빡님의 애첩을 범해?

 

중사는 정철훈의 아첨에 마음이 흡족한 듯 금방 키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 새꺄, 난 공주님을 범했습니다. 죽여주십쇼, 라고 해.

 

중사님, 정말 범하지 않았습니다.

 

끙끙거리면서도 오태봉은 완강히 부인했다.

 

뭐야, 이 새끼.

 

갑자기 화가 치민 이 중사는 그의 널따란 발바닥으로 오태봉의 머리통을 냅다 질렀다. 오태봉은 바닥으로 벌렁 넘어졌으나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곧 똑바로 박아 자세를 취했다.

 

이 새꺄, 난 공주님을 범했습니다. 죽여주십쇼, 라고 해.

 

난 공주님을… 범했습니다. 죽여… 주십쇼.

 

끙끙거리면서 오태봉은 간신히 복창했다. 그의 주근깨투성이인 얼굴은 충혈로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좋았어. 이번만은 내 용서한다, 오태봉 네 자리로 돌아가.

 

오태봉은 이 정도로 끝이 난 게 다행이라는 듯이 얼른 몸을 일으키고 헤죽헤죽 웃으며 벽가로 비켜났다.

 

선생, 변소에 있는 내 마누라 보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