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열씨는 중사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몹시 거북했다. 그는 물론 오래 참고 견디었으므로 생각은 간절했지만 한 마리의 강아지를 맨 먼저 태운다는 것은 서열로 보아 너무나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정철훈이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중사님 먼저 들어가시죠.
그는 중사를 돌아보며 계면쩍은 표정으로 첫번째 차례를 사양했다.
선생, 먼저 들어가쇼.
중사는 그의 사양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난 말요, 2호 일명 똥 싸러 갑니다 이거요. 알겠어요? 쭈그리고 앉아서 꽁초나 먹겠다 이겁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순열씨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그것은 어물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가라. 여기서는 사양은 미덕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열씨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정철훈에게 다가가 강아지와 대가리를 받아들었다. 그는 그것을 얼른 손아귀에 감추고 철창 앞으로 나아가 신고를 마친 다음 변소 문을 열고 변소로 들어갔다.
조그만 문은 그 외양과는 달리 매우 두껍고 무거웠다. 그 문이 일단 닫히자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바깥이라야 여기서는 기껏 2호의 감방이나 철창 밖 복도 따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변소 안에 들어간 순열씨는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는 군화 발자국 소리, 욕지거리, 미친 듯이 킬킬대는 웃음소리, 취사당번들의 그릇 씻는 소리, 구타당하는 신음소리, 근무자의 위협하는 소리 따위의 소음으로부터 그의 청각을 보호해준 조그만 문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불과 반 평도 못되는 좁은 면적에서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서서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었다. 그는 쪼그라진 아리랑 한 개비를 조심스럽게 입에 물고 단 하나의 성냥알을 그어서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이것은 2호에 남은 마지막 강아지였다라고 느끼자, 그는 새삼 그 첫번째 한 모금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더구나 이것은 노란띠였고 노란띠가 수입되는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닌 것이다. 보통 총장이 수입해 주는 것은 필터가 없는 저질의 담배뿐이어서 노란티나 흰띠를 구경하기는 힘들었다.
총장은 이따금 특히 08을 많이 잡아준 호에 보너스 격으로 노란띠나 흰띠를 한두 마리 섞어서 수입해 주는데 그것은 데빡이나 대단한 고참이 아니고서는 입에 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순열씨는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여다가 그것을 천정을 향해 천천히 내어 뿜었다. 연기는 넓고 얄따랗게 벽 위로 펼쳐지면서 천천히 어두컴컴한 천정으로 빨려 올라갔다. 그는 궐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그것을 빨아들이고 연기를 다시 뿜어내는 일련의 동작을 통해서 비록 잠시나마 자기가 감금에서 해방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토록 겹겹이 사슬로 묶인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잠시나마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아주 야릇한 일이었다.
당신은 시를 쓰느냐고 중사는 말했고, 난 시를 쓸 줄 몰라요, 하고 순열씨는 대답했다. 난 당신이 시를 쓸 줄 알았다구. 어쩐지 그렇게 보였어 하고 중사는 덧불였다.
하지만 써보슈. 당신은 쓰면 될 거야. 우린 생각은 많지만 대가리가 워낙 썩어놔서 어림없다구. 종이하고 연필을 줄 테니까 한번 써보슈. 심심풀이로.
난 시를 써본 일이 없어요. 시는 여기도 많이 써 있는데요.
순열씨는 손으로 시멘트 바닥과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쇠붙이 조각으로 시멘트를 파서 새긴 크고 작은 글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삶
1965. 3. 2. 대구 이길남.
삶
1967. 8. 11. 포항 박우범.
눈물의 3년
1968. 5. 30. 광주시 학동 이성우.
삶
제주시 김봉래.
배고파 미치겠다. 영자야.
1965. 9. 17. 삼천포 이건길.
이게 낙서지 시는 무슨 시요?
중사가 반문했다.
이거는 훌륭한 시죠. 이거 봐요, 삶, 이 한 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압축한 것입니까? 이건 참 훌륭한 시입니다.
선생, 내 얘긴 이따위 시 얘기가 아니고 선생이 그 말한 거 있지 않소? 변소에서 생각났다는 거 말요. 그걸 쓰면 진짜 시가 되겠다 이거요. 한번 써보슈.
아, 알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시를 쓸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하고 말했었죠. 내가 변소에서 느낀 것은 여기가 낙원이구나 하는 거죠, 변소 문은 말요, 우리에게 출입이 허용된 유일한 문이고,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죠.
그렇긴 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내가 시를 쓸 줄 알았다면 <여기는 낙원>이란 제목으로 하나 쓰겠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히히, 당신은 재밌는 사람이야, 이 속에서 시는 무슨 시야? 하지만 재미있다구, 그 제목도 참 재미있고, 제목까지 잡아놓았으면, 그러지 말고 써보슈. 야. 정철훈, 선생께 편지 종이 한 장하고 연필을 갖다 드려.
그는 순열씨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멋대로 지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