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은 중사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말참견을 하지 않았다. 물론 한마디 무어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해도 이 중사에게서는 본전도 찾지 못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기다린다, 무엇인가 눈에 뵈지 않고 쉽사리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무엇을 기다린다는 태도로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는 세운 다리 사이에 얼굴을 깊이 처박고 쭈그리고 앉아 있으므로 이쪽에서는 그의 사나운 이마 굵다란 주름투성이 이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정철훈이 침묵으로 들어갔을 때 그 주름투성이 이마는 더욱 포악하고 완고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때 순열씨는 약간 놀란 눈길로 하사의 완고한 이마를 바라보았다. 저 사나이가 무기수였다고? 저 튼튼하고 배짱 좋은 사나이가. 그는 그게 쉽사리 믿어지지 않아 속으로 혼자서 반문했다. 그는 마치 이 중사에게, 아니 그보다는 정철훈에게 단단히 속아넘어간 기분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저어도 정철훈은 튼튼하고 즐거운 사나이였다. 그는 하치않은 일로도 자주 혼자서 벌쭉벌쭉 웃기를 잘했고, 이따금 신바람이 나서 춤추는 듯한 걸음걸이로 걸어다녔다. 그 때문에 이 중사에게 자주 쿠사리를 당했었지만.

 

그런데 그 만만한 배짱이나 패기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순열씨는 그의 형기에 놀라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가 일단 무기수였다는 것을 알고 난 지금 남을 조롱하고 싶은 충동이 없이는 그럴 수 없는 그의 느긋한 걸음걸이, 능글맞은 웃음 따위에 놀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 저놈 얘기가 웃기는 겁니다.

 

중사는 혼자서 헤헤거리며 웃다가 갑자기 순열씨에게 다가들었다. 웃느라고 마음껏 크게 벌려진 중사의 입이 순열씨의 코앞으로 다가들자 하마의 이빨처럼 길고 꼴사나운 중사의 뻐드렁니가 훤히 드러났고, 그의 입에서는 노리끼한 악취가 물씬 풍겨나왔다.

 

저놈은 말요, 글쎄 월남에서 재판받을 때 얘긴데, 저놈 말이 재판 받기 전에 굉장히 혼났다 이거요. 왜 그랬느냐 하면 자기는 갈데없이 사형인 줄 알았다, 이겁니다. 월남 민간인들이 떠들고 월남 정부에서도 업저버가 나와서 압력을 가하는 판이니까 이건 사형이구나, 난 죽었다. 하하 난 틀림없이 죽었구나 하고 눈 딱 감아버렸다 이거요.

 

그러고는 막상 땅 하고 판결 떨어지는데 이건 웬 떡이냐? 무기더라 이거요. 그래서 정말 무기일까. 정말 살아난 것일까. 믿어지지 않아서 지 허벅다리 살을 꼬집어보고는 사실이길래 벌떡 일어나서 만세 했다 이겁니다. 하하, 좆새끼, 만세는 무에가 만세냐, 무슨 갈보년 거기 썩어문드러진 만세냐, 내 말은 이겁니다. 그랬더니 저놈 말이 무기였으니까 만세 했다 이겁니다. 흐흐흐 히히 선생. 이게 말이 되는가요? 무기니까 만세했다. 무기니까 만세.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죠.

 

순열씨는 정철훈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똥치보다는 갈보가 낫다 이건가요? 저 새끼 배짱 한번 좋았어.

 

멀어져갔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2호에서는 여기저기 힘쓰는 소리가 들렸다. 군화 발자국 소리는 시계추 소리처럼 아주 규칙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그들은 조 수병님이 지금 몇 호 앞을 가고 있다. 자기 호에 얼마쯤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듯 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또 조 수병님의 걸음걸이가 그 육중한 체중 때문에 매우 느리고 그의 입이 무거운 대신 그의 펀치가 매우 폭발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근무자들은 누구나 자기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특징이 없는 자는 특징이 없는 근무자로서 위신이나 권위가 전혀 서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죄수새끼들이 전혀 알아주지를 않기 때문에 자기 특징을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인데 조 수병님의 특징은 바로 이 느린 걸음과 무거운 입, 그리고 무엇보다 그 폭발적인 펀치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완만한 평소의 동작이나 무거운 입은 다만 그 강력한 펀치라는 특징을 한층 두드러지게 해주는 부차적인 특징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않는 한 1호에서 7호까지의 반원형의 복도를 계속해서 걸어다녔다. 매우 느린 걸음걸이로. 이것이 그가 근무 시간에 하는 일의 전부였다. 그는 특별한 반역이 눈에 뜨이지 않는 한 한마디도 지껄이지 않는다.

 

조 수병님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뻗어 뻗어.

 

라고 중사가 말했다. 그의 말소리는 여느 때와는 달리 숨이 차고 기운 없게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중사도 지금 벽에 의지해서 거꾸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사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2호 동료들은 이미 가까워오는 군화소리를 들었고, 다리를 뻗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벽에 기댄 다리는 자꾸만 비틀거렸고 다리를 반듯이 세우기 위해 다리에 힘을 쓰면 쓸수록 다리는 점점 더 무거워만 갔다. 그렇지만 조 수병님이 2호 앞에 다가섰을 때는 그들은 용케도 흔들리지 않고 잘 버티어냈다. 이 순간만 버티자, 조 수병님이 2호를 지나 1호 쪽으로 건너갈 때까지만 잘 버티자, 그들은 모두 조 수병님의 그 강력한 펀치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조 수병님이 2호 앞을 일단 지나가버리자 2호 사람들은 다리에 힘을 빼고 편한 자세로 바꾸었다. 그들은 다리를 적당히 구부리고 벽에 최대한으로 의지해서 자기들의 힘을 덜 소모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때 순열씨는 자기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팔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눈앞에는 지금 단조로운 시멘트 바닥과 시멘트의 벽이 팔랑개비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벼찌 붙어, 벼찌 붙어는 내게는 벅차구나. 그는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아직 거꾸로 서는 자세에는 숙달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몹시도 경련하는 자기 팔이 매우 부끄러웠다. 이 팔은 지금 자기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있다. 그게 그는 매우 부끄러웠다. 그는 이런 자세가 이렇게 벽을 향해 거꾸로 서서 버티는 자세가 어떤 시대에 어떤 경우에 반드시 필요한 자세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만 지금 자기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는 자기 팔이 매우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는 자기 시야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바닥과 벽을 똑바로 붙잡으려고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시야의 사물들은 그의 시선에 쉽게 붙잡히지 않고 여전히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는 마치 그 표정 없는 바닥과 벽에게 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지금 그의 거꾸로 선 자세를 비웃고 그의 충혈된 눈을 우롱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현기증이 일어났고 몸의 중심을 잡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