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열씨는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동료들은 귀가 좋지 않은 탓인지 혹은 순열씨의 목소리가 작기 때문인지 어느덧 서로 무르팍이 겹치도록 가깝게 좁혀들었기 때문에 순열씨는 약간 갑갑증을 느꼈다. 그들의 입에서는 역시 그 특유하게 노리끼한 악취가 새어나왔고 그들의 호흡이 가빠지자 그 악취는 더욱 순열씨의 후각을 괴롭혔다.

 

그는 또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다소의 불안 때문에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데 매우 불편을 느꼈다. 그는 빠른 눈길로 철창 바깥 복도의 동정을 살폈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정철훈의 동정을 살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그보다도 2호는 지금 난데없는 만담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근무자에게 발견된다면 작살이 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근무자는 입이 무거운 대신 폭발적인 펀치를 가진 조 수병이었다. 그는 반역이 발견되면 서슴지 않고 키를 따고 감방 안으로 들어온다.

 

정철훈은 벽 쪽으로 비스듬히 돌아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이따금 그쪽에서는 코고는 소리까지 들렸다. 하지만 순열씨는 그가 결코 자고 있지 않다는 것, 그의 태도는 자기 이야기를 거부하는 일종의 시위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이 중사는 눈치가 빠른 사나이였고 그는 아직 2호의 데빡이었다. 순열씨는 그가 주먹으로 자기 허벅다리를 한바탕 문지르자, 방금 스쳐간 한가닥 불안을 곧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 반년 동안에 그녀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딱 한번 그 여자의 소리, 말소리, 그게 그 여자의 말소리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 여자 소리였겠죠. 그 소릴 들은 일이 있어요. 어느날 저녁, 그러니까 여름밤의 아홉시 무렵인데 이미 주위가 어두워져 눈앞으로 십 미터도 잘 보이지 않을 때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그날 나는 유독 늦게까지 그 공지에 서 있었죠. 이제는 기다리는 데 만성이 되어서 이미 내 마음에서는 그 여자를, 여름 대낮에 잠깐 스쳐본, 그것도 반년 전에 딱 한번 본 그 여자 얼굴을 잊어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난 그 여잘 기다리는 게 아니고 이제는 그 여자를 기다리는 내 마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죠. 그러니까 그 여자 자체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두운 공지에 서서 그냥 우두커니 역시 어두운 건너편 집 정원을 지켜보는 참이었죠.. 그건 누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게 아니고 그냥 습관이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마당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어요.

 

아주 부드러운 처녀 목소리로,

 

아줌마, 비가 와요, 빨래를 걷어야죠.

 

그리고는 조금 걸걸한 여자 목소리로,

 

어마, 나 좀 봐.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네.

 

그리고는 두 사람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그 처녀의 목소리가 다시,

 

내 수건은 어디 있어요? 어디?

 

그리고는 바쁘게 신발 끄는 소리가 나더니 곧 조용해져버렸어요.

 

어두운데다 그 나무들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귀를 바짝 기울이고 그 소리를 들었고, 그리고는 있구나! 거기 있었구나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죠. 왜냐하면 내가 잊어버렸던 것이 하두 오래 나타나지 않으니까 거기 없을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 여자는 거기 살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하고 거의 잊어버린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렇게 부르짖은 거죠.

 

일단 그 여자가 그 집에 있다. 그동안에도 있었다. 내가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자, 그 목소리가 그 여자 목소리라는 걸 어떻게 믿느냐고요?

 

나는 육감으로 알았죠. 우유빛 소리, 소리에 빛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희뿌연 우유빛 소리인데다 보통 듣기 힘든 맑고 수줍어하는 것 같은 한마디 한마디가 가락에 맞추듯 조심조심 울려나오는 걸로 보아, 그 여자의 살빛이 희뿌연 우유빛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여자는 처녀였고, 그 집에서 그렇게 곱다란 말소릴 가진 처녀란 그녀밖에는 없을 것이므로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그 여자의 것이라고 믿은 거죠. 나는 육감으로 알았어요.

 

하여튼 그 여자가 이때까지 그 집에 있었던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자 나는 공지에서 하릴없이 서성거리며 보내버린 반년의 시간이 허망스럽기 짝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렇게 거기 서서 시간을 보내며 기다린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바로 지척에 있으나 그것은 저절로 다가오거나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닌데 한 번도 거게 손을 뻗어보지 않고 그냥 기다린다.

 

그냥 망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 나는 존재란 획득하는 과정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고는 있었죠. 다시 말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탐내고 그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계획하고 노력하는 그런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이거죠. 하지만 나는 탐을 낸 일은 있지만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던 겁니다. 말하자면 우두커니 서서 막연히 기다린 나머지 이윽고는 일찌기 탐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게 한번 본 일은 있지만 어떻게 생겼던가조차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참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 이 정도는 알고 있던 내가 왜 노력하지 않았던가, 왜 서서 기다리고만 있었던가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