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팔 이십 일이다. 이십 일.
갑자기 중사가 침묵을 깨고 내뱉었다. 그가 이십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십일만 기다리면 자기는 출감하게 되고 따라서 이 벼찌 붙어라는 고역도 면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매우 헐떡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소리는 힘껏 부르짖는 절규였다.
그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시멘트 바닥을 노려보며 절규했고, 그리고는 다시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이때만은 데빡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다만 그가 지금 원망하는 것은 시간인 것이다. 그가 원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시간뿐이었다.
조 수병님은 너그럽게도 시간을 잘 지켰다. 그는 삼십 분이 경과하자 곧 자기 근무 시간의 첫번째 메뉴를 거둬들였다. 정좌, 평좌, 열중쉬어 따위의 몇 단계를 거쳐 편히 쉬어로 들어가자 2호 사람들은 모두 벽으로 기어들었다. 그들은 벽이 그립고 미더웠으며 그것이 방금 그들을 괴롭히는 형틀 노릇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거기에 마음껏 등을 기대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선생, 그래서 어떻게 된 거요?
뭐가 말요?
순열씨는 돌연한 중사의 질문에 어리둥절해져 반문했다. 그는 아직 숙달되지 않은 고역을 치르고 나서 피로에 지쳐 있었다.
그 대문을 열고 들어간 여자 말요. 그년을 결국 조졌소?
아, 아니오, 조진 게 아닙니다.
그럼 뭐요? 재미없게 됐구만.
중사는 실망했는지 잠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양쪽 벽을 따라 늘어앉은 동료들을 휘둘러 보았다. 잠시 후에 그는 뭔가 떠오른 듯 눈을 깜짝거리면서 순열씨를 보았다.
그거는 고상한 얘긴가 본데, 나는 압니다. 선생이 얘기하는 걸 물론 나는 알죠. 나는 이래봬도 고등학교 출신이고, 이래봬도 나는 음악이라든지 문학, 거 왜 괴테의 로미오와 줄리에트 있지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지금 틀리고 있죠? 그건 누가 썼죠? 그래 맞았다. 셰익스피어, 그 새끼 거물이야, 하여튼 학교 때는 그것도 읽었으니까, 난 선생의 얘길 알죠. 하지만 저 새끼들은 그렇게 얘기하면 김 팍 새는 거요. 그러니까 선생, 년을 조졌다고 얘기하슈. 조지지 않았더라두 조졌다고 하란 말요.
중사는 신이 나서 지껄인 뒤 순열씨의 반응이 어떤가 하고 짓궂은 눈초리로 순열씨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중사의 그 짓궂은 눈초리를 보자, 순열씨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잠시 혼자서 생각한 뒤 중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중사가 낮은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제의는 지금 거의 강요에 가깝다는 것을 순열씨는 이해했던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 중사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고 그의 넓적한 손바닥으로 순열씨의 무르팍을 탁 쳤다.
당신은 센스가 있단 말야. 당신은 우리들을 이해하고 있어. 그래서 나도 당신이 좋다 이거야.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순열씨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순열씨는 중사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됐어 그럼 됐다구. 히히 흐흐.
그는 천하리만큼 멋대로 웃고는 손을 저어 동료들을 불렀다.
이 새끼들아, 그렇게 찌그러져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라구. 우리 선생님이 얘기를 하신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오태봉과 천명우 그리고 중대가리 신참들이 서로 눈치를 살펴가며 앉은뱅이 걸음으로 슬슬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다가오는 그들의 표정은 무슨 비밀의 절도에나 가담하는 것처럼 하나같이 의미심장했는데 그것은 변소 문 옆에 앉아 있는 정철훈이 아직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철훈이 순열씨의 이야기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지금 정철훈의 노여움을 사둔다는 게 자신을 위해 별로 이롭지 못한 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정철훈을 제외한 전원이 순열씨와 중사를 에워싸고 모여앉았다.
그런 뒤에 그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지요. 나는 그러니까 닭 쫓던 개 모양으로 맥이 풀린 거죠.
씨팔, 내 같았으면 담을 뛰어넘는 거라.
이때 오태봉이 몹시 답답한 듯 거들고 나섰다. 그는 눈치코치 보지 않고 기분에 들떠서 팔을 휘둘러댔다.
이 새꺄, 잠자코 듣지 못해? 괜히 무드 깨지 말라구.
중사의 일갈에 오태봉은 쑥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난 한참을 거기서 서성거린 거요. 신흥촌이라 마침 그 집 맞은편에 축대를 쌓아올린 공지가 있었는데, 나는 이 공지의 축대 난간에 서서 행여 그 집 대문이 열리나 하고 기다렸죠. 그녀가 어쩌면 한번쯤 다시 나올까 하고. 그때 그녀가 나와본들 내게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순진했으니까.
그런데 그날 해가 질 때까지 축대 난간에서 기다렸지만 그녀는 얼씬도 안했죠. 그래서 그날은 허탕을 치고 그냥 돌아왔어요. 그 뒤로 내가 얼마 동안 그 공지의 축대 난간에서 배회한 줄 알아요? 반년을 매일 쫓아 다녔어요. 저녁나절이면 으레껏 출근하듯이 그 신흥촌 언덕배기로 올라가서 그 공지에서 서성거렸던 말요.
왜 거기 가서 서성거렸느냐, 왜 매일 그랬느냐 하면 그 공지의 축대 난간에서는 그 집의 안뜰이 건너다 뵈었거든요. 이층집인데 앞마당에 나무가 너무 많아서 저녁 무렵 그 집 사람들이 마당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려고 해도 나무 잎사귀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는 그 나무 사이로 그녀가 행여 어느 때나 보일까, 그녀의 모습이 보일까 하고 열심히 기다리면서 눈을 두리번거렸죠.
그런데도 그녀는 내 시야에는 얼씬도 안했소. 그러니까 혹 그 집 마당에 그녀가 나타났다구 해도 그놈의 빌어먹을 나무 잎사귀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아마 그랬겠죠. 그러니까 그놈의 나무들이 나를 얼마나 초조하게 만들었는지 몰라요. 하여튼 나는 반년 동안 그 공지에서 서성거렸지만 그녀를 한 번도 볼 수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