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이 말해서 나는 자신이 없었죠. 어떤 대상이 자기가 갖고 싶은 대상이 막상 나타나도 거기에 접근하기가 두렵고 겁만 앞선 겁니다. 왜냐하면 접근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노력해봐도 결국은 별 수 없다. 결코 되지는 않을 거다. 왜 되지 않는가, 어째서 좌절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될 만한 무슨 필연적인 곡절이라도 내게는 있는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그냥 지레 겁을 먹고 그 대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있기만 하는 겁니다.
이윽고 나는 자기에게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 또는 획득되어지지 않는 어떤 필연적인 곡절이 정말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확실히 곡절이, 필연적인 곡절이 있기는 있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자각증세에 있었다 이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병들어 있다. 그렇다고 몸에 별다른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틀림없이 어느 곳에 병이 들어 있다는 생각과 또 나는 누구보다 걱정이 많은 사나이다. 누구보다 불안하고 걱정이 많아 몹시도 거기에 시달리는 사나이다.
걱정이 많다는 것도 따져보면 자기가 그만큼 무능하고 자기 내부에 그만큼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에 결국 병들었다는 거나 같은 얘기죠. 이따위 생각들 때문에 자신을 잃고 있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따위 증상이라는 게 어디서 연유했죠?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겉치레 인사말에서 그것도 막연한 추측으로 우연히 내게 던진 몇 마디 말.
요즘 어디 아프냐?
혹은,
자넨 밤낮 무슨 걱정거리가 그다지도 많은가?
이따위 몇 마디 말에서 연유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몇 마디가 이윽고 나의 고정관념으로, 어쩔 수 없는 고정관념으로 되어버리는 무서운 과정을 깨달았죠.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너무도 끊임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같은 말을 끊임없이 내 귀에 대고 지껄였기 때문이었죠. 나는 결국 그 고정관념을 깨뜨렸습니다.
제기랄 그러니까 그 고정관념은 조진다는 거요? 조지지 않겠다는 거요? 난 지금 똥창이 뻐근하다 이거요. 내가 그걸 꽉 막고 있으니 망정이니 살짝 열기만 하면 당신도 질식하고 말 거요.
중사의 말에 주위에서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한바탕 웃어댄 그들은 퍼뜩 정신이 들어 철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 수병님의 발자국 소리가 7호 근처에서 들려왔지만 그들은 여태 그 발자국 소리를 잊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은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들이 시간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고 생각하자 아주 기분이 유쾌했다.
순열씨는 잠깐 입을 닫고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그의 닫혀 있는 입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지금 기다린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의 눈길은 또 빨리 끝을 내라, 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재미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열씨는 그 여자를 조지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는 곧 그것을 찾아냈다.
나는 말하자면 용기를 얻은 거죠. 나는 병들지도 않았다. 또 나는 특별히 걱정이 많은 사나이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고, 그리고 그 생각을 믿은 거죠. 나는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탐하고 그걸 갖기 위해 노력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그제서야 지극히 당연하다고 인정하고 어느날 그 오래 닫혀 있던 대문을 두드렸죠.
그는 잠깐 숨을 몰아쉬고 얘기를 계속했다.
알구 보니 그 여자는 바걸이었어요. 놀라운 일이죠. 그녀는 내가 자기에게 반해서 자기를 찾아온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죠. 그녀는 참 순진한 양반도 다 보겠네. 아무튼 놀러 와요. 나 M동의 홍접(紅蝶)에 나가요. 여섯시부터 2번을 찾으면 돼요.
이렇게 내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공지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는 그녀는 바의 어두운 박스 속에서 술과 웃음과 간지러움을 파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이겁니다. 다소 김이 샜지만 나는 결국 여기저기서 돈을 꾸어서 목돈을 만들어가지고 <홍접>의 2번을 찾아갔죠. 나는 그날 밤 그녀를 돈으로 산 겁니다.
끝난 거요?
순열씨는 뒤로 조금 물러 앉으면서 중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여앉았던 동료들은 라스트 신이 싱겁게 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처럼 씁쓰레한 얼굴로 주춤주춤 제자리로 돌아갔다.
당신은 그년의 맛이 좋았다든지 나빴다든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는구먼. 너희들 상상에 맡긴다 이거지? 좋았어. 아무튼 선생, 수고했수다. 야 정철훈.
중사는 한바탕 지껄이고는 갑자기 성이 난 사람처럼 언성을 높여 정철훈을 불렀다. 그는 자기 말마따나 지금 똥창이 터질 것 같아 초조한 데다 정철훈이 아직도 잠자는 시늉을 하고 있었으므로 더욱 다급했는지도 몰랐다.
중사의 부름에 정 철운은 퍼뜩 눈을 뜨고 중사를 향해 돌아앉았다. 그는 손등으로 연방 눈을 비벼댔으나 그의 커다란 눈은 방금 자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선생에게 강아지 한 마리 드리라구.
중사의 지시에 정철훈은 깜짝 놀라 중사와 순열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놀란 것은 정철훈만이 아니었다. 벽을 따라 앉아 있던 오태봉이나 천명오 그밖의 신참들도 모두 놀란 얼굴로 중사를 바라보았다.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중사님.
정철훈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중사에게 말했다.
알구 있다구. 이 새꺄, 드리라면 드리는 거야. 말이 많아.
정철훈은 하는 수 없이 철창 쪽에 등을 대고 돌아앉아 그의 바른쪽 다리의 발목 근처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하얗고 목이 긴 군용 양말을 훌렁 까내리고 뚤뚤 말아진 조그만 종이 꾸러미를 양말 속에서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