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까? 나는 쌀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골목 속에서 성애가 벽에 찰싹 몸을 기대고 겁먹은 눈초리로 이쪽을 보고 있다. 그녀는 내가 아줌마로부터 거래하는 광경을 죄다 훔쳐보았음이 틀림없다.

 

나는 멋쩍어서 행길 바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성애와는 여태까지 제대로 말을 주고받은 일이 없다. 몇 달 정도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지만, 나는 언제나 방 안에 있었고 성애는 언제나 집 밖으로 돌아 다녔다. 그녀가 내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녀는 내가 자기 부친에게 그녀의 출현을 밀고할까 봐 겁먹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약간 마음이 놓였는지 골목에서 천천히 나왔다.

 

“아저씨, 일루 좀 와 봐요.”

 

전부터 친했던 사이처럼 과장된 표정으로 그녀가 내게 손짓했다. 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서자 성애가 물었다.

 

“아버지 집에 있죠, 지금?”

 

“계실 거요.”

 

“그럼 어쩌나, 시간이 없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미간을 찌푸리며 별다른 수치심도 없이 내게 우는 얼굴을 내민다.

 

“왜 그러오? 뭐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래요. 요전번 왔을 때 가방을 찾아간다고 했는데, 깜박 잊어 먹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찾으러 왔어요. 하지만….”

 

나는 얼른 눈치를 채고 말았다.

 

“가방을 어디다 두었소?”

 

“내 방 다락에 있어요. 아저씨가 좀 갖다 주시겠어요?”

 

“그건 곤란해. 내가 아가씨 방을 어떻게 들어가겠소? 까딱하면 난 도둑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구.”

 

“호호호,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눈 딱 감고 한번만 수고를 해주세요. 아저씨, 커피 마시고 싶죠? 내가 커피 사 드릴께요. 딱 한번만 수고해 주셔요.”

 

“어디서 기다리겠소?”

 

“저기 비탈길 이충 백조 다방에 있겠어요. 갖다 주시는 거죠?”

 

“기다려 봐요.”

 

그녀는 이상야릇한 웃음을 내게 흘려보내고 재빨리 돌아서서 비탈길로 껑충껑충 뛰어올라갔다. 나는 어째서 공모자가 되었을까? 이건 노인에 대한 공공연한 배신이다. 성애의 새하얀 살결 위에 피어오르는 갑작스런 웃음의 매력에 끌린 탓일까? 하지만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그 집 마당으로 돌아와서 인기척을 살폈다. 노인 내외는 바깥 날씨가 차가운 탓인지 안방에 내내 갇혀 있다.

 

성애의 방으로 들어가서 노오란 비닐 가방을 끌어내는 데 그닥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여 마당을 지나 나는 용케도 흔적 없이 대문을 빠져나왔다. 백조 다방의 실내는 어둡고 담배 연기로 자욱하였다. 동네의 건달들과 그날 작업을 맡지 못한 일꾼들이 여기저기 의자에 푹 파묻혀서 큰소리로 떠들거나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성애는 마담과 구면인지 카운터 옆자리에 앉아서 마담과 얘기를 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