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좁은 골목길이 나서는데, 골목 좌우에는 나지막한 가옥들이 마치 벌집처럼 밀집해있다. 어느 집에서나 뒷길로 열린 창을 밀면 이웃집 마당이나 담벼락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다. 나는 좁은 골목길을 이십여 미터쯤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갔다.

 

회색 철대문이 곧 나타났다. 성인의 큰 키만큼 높은 이 대문으로 말하자면 이 일대에서 거의 유일하게 품격을 갖춘 대문이며, 꼭대기에 붙어 있는 편지함이라든가 초인종 단추, 안쪽의 빗장 따위가 제법 세밀한 안목으로 제작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회색빛 대문을 보면 이 집 주인 영감(아마도 지금쯤 고인이 되었을지 모르겠다)의 취향이라든가 깐깐한 성품이 금방 떠오를 지경이다. 나는 손을 높이 뻗어 초인종 단추를 눌렀다.

 

두어 번 초인종 단추를 눌렀을 때 귀에 익은 뚱보 할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누굴 찾으시죠?”

 

할매는 안방에서 문만 살짝 열고 소리치고 있다.

 

“할머니, 문 좀 열어 주세요. 그런 다음 제가 누구라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그녀가 뭐라고 투덜거리며 신발을 끌고 마당으로 나왔다. 본래 할매는 성질이 급한 편이라 초인종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뛰어나와 문을 열고 상대방 낯짝을 직접 확인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대문이 열리자 양쪽 볼에 유난히 군살이 많은 특유의 그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다.

 

“저예요. 아시겠어요?”

 

“누구더라….”

 

시력이 갑자기 악화된 노인처럼 그녀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내 모양을 살핀다. 그러더니 금방 손바닥을 딱 마주쳤다.

 

“오오라, 이씨로군. 아니, 이씨가 웬일인고? 내 정신 좀 봐, 이씨를 몰라보다니. 자, 들어오우. 난 또 누구라고. 하마터면 몰라 보고 그냥 돌려보낼 뻔했네. 들어와요. 우리 집은 그 전처럼 늘 쓸쓸하고 조용하지 않수?”

 

“그렇군요.”

 

마당의 조그만 정원 주변에는 화분들이 이십여 개 늘어서 있다. 제각기 종류가 다른 화초들이 그 화분들 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죄다 금방 말라 비틀어질 것처럼 시들해 보인다. 나는 내가 기거하던 마당가의 별채 앞으로 다가섰다. 별채라지만 방 하나, 부엌 하나만 단조롭게 서 있는 작은 건물이다. 손님을 두기 위해 따로 세워진 이 건물에서 나는 일 년을 생활했다. 헌 구두 한 켤레가 방문 앞에 놓여 있었다.

 

“누가 있군요.”

 

내가 말하자 뚱보 할매가 계면쩍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있어요. 세무서에 나가는 사람이라오. 지금은 방에 없어요. 지난달에 들어왔다오.”

 

방의 옛 주인, 옛날 손님이 그 방에 다시 나타났을 때는 현재의 점유자에 대한 기묘한 반감을 품게 되는 모양이다. 할매도 그 기분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사오 년 동안 이 방이 비어 있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다. 많은 손님이 이 방을 거쳐 갔을 것이다.

 

나는 불현듯 방문을 열어보고 싶었다. 물론 부도덕한 행위였다. 그 방 안에 내가 감춰둔 것이 있을까? 유형의 어떤 물질이 있을까? 홉사 그 속에 내가 쓰던 재떨이나 앉은뱅이 책상, 그런 것이 뒹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할매가 안채의 마루로 가서 털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우. 내가 뭐 마실 거라도 갖다 드릴까?”

 

“아닙니다. 그냥 앉아 계세요.”

 

나는 그녀 앞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지금 외출하셨나요?”

 

“아니, 우리 집 영감을 만나러 왔수?”

 

마치 감정이 말라버린 박제의 표면처럼 그 얼굴 표정은 건조했다. 그녀는 본래 강건한 여자였다.

 

“뵙게 되면 더욱 좋지요.”

 

“미안하우. 작년에 가셨답니다.”

 

“돌아가셨다구요?”

 

“그렇다오. 이씨는 우리 집 영감이 위암을 앓고 있었다는 걸 몰랐소?”

 

“그건 금시초문인데요. 제가 있을 때만 해도 아저씨는 아무런 탈이 없었죠. 위병을 앓았던 건 아저씨가 아니라 저였어요. 커피를 좋아하셔서 저녁때마다 저쪽 길 건너 지하실 다방으로 커피를 마시러 다니시곤 했는데.”

 

“참 그렇네요. 그땐 몰랐던 일이로군. 그러니까 이씨가 나간 뒤 이태나 지나서 병이 알려졌던가 그랬을 거요. 이씨, 요즘은 거기 안 아파요?”

 

“전 다 나았습니다. 술도 마시고 뭐든지 다 먹어요.”

 

“아이구, 다행이오. 젊은 사람이 뭣보다 건강해야지. 지금 생각나는데, 그땐 상을 방에 들여보내면 이씨는 밥 한 술도 뜨지 않고 상을 고스란히 내줄 때가 많았지. 정말 답답해서 볼 수가 없었다오. 근데 이젠 다 나았군. 병이 있던 이씨는 이렇게 건강한데 병이 없던 우리 영감은 벌써 떠나 버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