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녀(妻女)
"무얼 또 꾸며대시네,
며칠 안 가서 그리워하실 텐데!"
- 청년
"무엇을요? 내가 그리워한다고."
- 처녀(妻女)
"그러믄요! 도회에는 어여쁜 색시 있구 놀음이 있구,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것도
날마다 밤마다 퍼붓는 함박눈밖에
강물은 얼구요 사람도 얼구요,
해는 눈 속에서 깼다가 눈 속에 잠들고
사람은 추운 데 낳다가 추운 데 묻히고
서울서 온 손님은 마음이 여리다구요.
오늘밤같이 북풍에 우는 당나귀 소리 듣고는
눈물을 아니 흘릴까요?
여름에는 소몰기, 겨울에는 마차몰이 그도 밀수입 마차랍니다,
들키면 경치우는-
단조하고 무미스러운 이 살림,
몇 날이 안 가서 싫증이 나실 텐데 -"
"시골엔 문명을 모르는 사람만이
언문도 맹자도 모르는 사람만이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만이
소문만 외우며 사는 곳이랍니다."
- 청년
"아니, 그렇지 않소,
내가 도회를 그리워한다고?
비린내 나는 그 도회에를
우정을 도량형으로 싸구요,
명예하는 수레를 일생 두고 끄으는
소와 막잡이하는 우둔한 차부들이 하는 곳을."
"굴뚝이 노동자의 육반 위에 서고
호가사 잉여가치의 종노릇하는
모든 혼정(魂精)이 전통과 인습에 눌리어
모든 질곡밖에 살 집이 없는
그런 도회에, 도회인 속에,"
"데카당, 다다, 염세, 악의 찬미
두만강가의 자작돌같이
무룩히 있는 근대의
의붓자식 같은 조선의 심장을 찾아가라고요!
아, 전원아, 애인아, 유목업아!
국가와 예식과, 역사를 벗고 빨간 몸뚱이
네 품에 안기려는 것을 막으려느냐?-"
그러면서 청년은 하늘을 치어보았다.
모든 절망 끝에 찾는 것 있는 듯이 -
하늘엔 언제 내릴는지 모르는 구름기둥이
조고마한 별을 드디고 지나간다.
멀리 개 짖는 소리, 새벽이 걸어오듯 -
8년 만에 온 청년의 눈앞에는
활을 메고 노루잡이 다닐 때
밤이 늦어 모닥불 피워놓고
고리를 까슬며
색시 어깨를 짚고 노래부르던 옛일이 생각난다.
독한 물지 담배 속에
"옛날에 남 이 장군이란 녀석이……"
하고 노농(老農)의 이야기 듣던
마을 총각떼의 모양이 보인다.
앗! 하고 그는 다시금 눈을 돌린다.
김동환 (시) - 국경의 밤 3부 (3)
- 세부
- 주동식에 의해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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