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 역사가 아직 다 끝나기 전에 올연선사(兀然禪師)가 나를 찾아왔소.
그는 일주일 간이나 소림사(少林寺)에 유숙하면서 나를 위하여서 날마다 법을 설하였소.
이보다 전에 아직 이 집터를 만들 때에 운허법사(耘虛法師)가 법화경(法華經) 한 질을 몸소 져다 주셨는데、이 법화경을 날마다 읽기를 두어 달이나 한 뒤에 올연선사(兀然禪師)가 오신 것이오.
운허(耘虛)、올연(兀然) 두 분은 무론 서로 아는 이이지마는 내게 온 것은 서로 의논이 있어서 오신 것은 아니오. 그야말로 다생의 인연으로、 부처님의 위신력、 자비력으로 내게 오신 것만을 나는 믿소.
또 이보다 수개월 전에 나는 금강산에서 백성욱사(白性郁師)를 만나서 삼사 일간 설법을 들을 기회를 얻었소.
또 이보다 십이삼 년 전에 영허당(映虛堂) 석감노사(石嵌老師)와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신계사 보광암(神溪寺普光菴)에서 비를 만나 오륙일 유련하는 동안에 불탁에 놓인 법화경을 한 벌 읽은 일이 있는데、이것이 법화경에 대한 이생에서의 나의 첫 인연이었고、또 그 전해에 아내와 같이 춘해(春海) 부처와 같이 석왕사(釋王寺)에서 여름을 날 때에 화엄경(華嚴經)을 읽은 일이 있었소. 또 우연하게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을 한 질씩을 사둔 일이 있었는데、이 집을 짓던 해 봄에 그것을 통독하였소.
이 모양으로 이 집에 와서부터 법화경을 주로 해서 불경을 읽게 되었소.
여덟 살 먹은 어린 아들의 참혹한 죽음이 더욱 나로 하여금 사람이 무엇인가? 어찌 하여서 나는가? 죽음이란 무엇이며、죽어서는 어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아니 생각할 수 없이 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내 죽은 아들 봉근(鳳根)도 나를 불도에 끌어들이기 위하여서 다녀간 것이라고 믿소.
관세음보살이、 혹은 비가 되시와 나로 하여금 보광암에 오륙일 유련하게 하시고、 혹은 아들이 되어、 혹은 운허법사、 올연선사가 되시와 길 잃은 나를 인도하신 것이라고 믿소.
또 예수께서도 그러하시였다고 믿소.
내가 신약전서를 처음 보기는 열 일곱 살적 동경 명치학원 중학부 삼년생(明治學院 中學部 三年生)으로 있을 때인데、그 후 삼십여 년 간 날마다 다 읽었다고는 못하여도 내 책상머리나 행리에 성경이 떠난 적은 없었거니와、 이것이 나를 불도로 끌어넣으려는 방편이었다고 믿소.
아무러나 나는 이 집을 지은 육년 동안에 법화행자가 되려고 애를 썼소.
나는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것이 어떻게 피상적인 것도 알았고、십 수년 계속하여 왔다는 도덕적 인격개조 운동이란 것이 어떻게 무력한 것임을 깨달았소. 조선 사람을 살릴 길이 정치 운동에 있지 아니하고 도덕적 인격개조 운동에 있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 일단의 진보가 아닐 수는 없지마는、나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서 신앙을 떠난 도덕적 수양이란 것이 헛것임을 깨달은 것이오. 내 혼이 죄에서 벗어나기 전에 겉으로 아무리 고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에 불과하다고 나는 깨달았소.
스물 여덟 살 되는 겨울에 나는 도덕적으로 내 인격을 개조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마흔 세 살 되는 봄、내 어린 아들이 죽을 때까지 십오 년간 나는 이 개조 생활을 계속하노라 하여 거짓말을 삼가고、 약속을 지키고、 내 책임을 중히 여기고、나 개인을 남을 위하여서 희생하고、남을 사랑하고、존중하고、 몸가짐을 똑바로 하고、 이러한 공부들을 계속하노라고 하였으나、 스스로 돌아보건대、제 마음속은 여전히 탐욕의 소굴이어서 십 오년 전의 내가 그 더러움에 있어서、 그 번뇌에 있어서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발견하였고、 앞으로 살아 나아갈 인생에 대하여 아무 자신도 광명도 없음을 스스로 의식할 때에 나는 자신에 대하여 역정이 나고 말었소.
문학을 하노라 하여서 소설권이나 썼소. 사상가 자처하고 논문편도 썼고、지도자 자처하고 나보다 젊은 남녀들에게 훈계 같은 말까지도 수천만 어를 하였소. 그러나 홀로 저를 볼 때에、
"이놈아、네 발뿌리를 좀 보아!"
하는 탄식이 아니 날 수가 없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