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2) - 저마다 잘나서
이튿날 아침에 누가 와서,
"어젯밤 물은 괜히 댔습니다. 남의 모낼 물을 댔다고 댁 논두렁은 여러 군데 잘라놓아서 물 한 방울 없습니다. 댁 논 밑에 생갈이할 논에만 물이 그득합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제 논에 들어올 물을 우리 논에 넣은 것이 분해서 우리 논에 닿은 물을 제 논도 아닌 논에 찌어버린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나비가 쌍쌍이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이지나 않는가 하고.
나는 다시 남과 다투어서 봇물 댈 생각을 버렸다. 비오기나 기다리자.
물은 왜 없나? 정말 없나? 나는 이 동네에 유명한 실농군인 Y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이와의 문답을 종합하면 이러하다.
이 동네 논은 샘논, 고래논, 봇돌논, 세 가지가 있다. 샘논이란 것은 제 논 안에 또는 제 논 가까이 샘을 가진 논이다. 그 샘이 논보다 높이 있으면 가만히 있더라도 저절로 논에 물이 닿으니 영영 물 걱정은 없는 논이다. 만일 샘이 논과 같은 평면 이하에 있으면 사람이 물을 퍼 대어야만 논에 물이 드는 것이니 이것은 좀 인력이 드는 것이어서 누워서 떡 먹기는 못되는 것이다.
고래논이란 것은 산골짜기에 있는 것으로서 산에서 졸졸 내려오는 장류수를 받는 논이니 이것도 누어서 떡 먹기와 같은 논이지마는 이런 것은 대개는 큰 배미는 없고 조그마한 배미가 층층대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세모난 놈, 찌그러진 놈, 꼬부라진 놈, 이 모양으로 생김생김이나 크기가 형형색색이어서 소위 마늘 배미, 종지 배미, 접시 배미하는 별명을 가진 것이 있고 양푼 배미, 대야 배미라면 무척 큰 배미이다. 이곳에 그중 착한 사람인 P노인이 부치는 꽃나미 논이란 것은 겨우 서마지기가 배미 수로는 마흔 다섯이나 된다는 것이다.
봇돌논은 보라고 하는 돌을 쳐서 개울물을 끌어대는 것으로서 이것은 좀 대규모의 관개법이다. 우리 동네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을 끌어대는 보가 상노깨보, 두리개보, 사갑들 웃보, 아랫보 이 모양으로 넷이 있는데 그 중에 두리개보라는 것이 제일 물이 넉넉한 보라고 하나 그것도 요새 가물에는 겨우 차례를 정하여 이 논에 하루 저 논에 하루씩 물을 대고 있는 형편이다.
이상한 것은 두리개보에는 약간한 법이 있어서 물싸움이 적은데, 상노깨보라는 것은 조금도 질서가 없어서 뱃심 좋고 염치없는 사람만이 물을 얻어보게 되어 있다. 아마 두리개보에는 언제 한 번 좋은 지도자가 나서 법을 정했던 모양이다. 법이란 한 번 정해서 한참 동안 실시에 힘을 써서 한 번 자리만 잡히면 용이히 변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성질이 있기 때문에 나라도 되고 문화도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상노깨보의 몽리 관계자는 사십 명이나 된다는데 도무지 법이 없다. 여기는 개벽 이래에 아직 한 번도 지도자가 난 일이 없는 것이다. 이 원시 상태, 무정부 상태를 정리하여서 물을 골고루 받게 하는 일은 오직 대정치가의 출현을 기다려서야 될 일이다.
오늘도 상노깨보를 친다고 다들 나오라고 해서 우리 집 박 군도 삽을 메고 나갔다. 이것이 금년 철 잡아서 벌써 네 번째다. 금년 철이라야 두 달 동안이다. 처음에는 해묵은 봇돌을 하느라고 전부 났고, 둘째 번 셋째 번은 상노깨돌에 못자리를 가진 사람들만이 났고 이번에는 모가 거진 난 뒤라 전원이 출동하라는 것이다.
Y노인의 말을 듣건대 만일 사십 명이 나서 하루만 잘 일을 한다면 이 보는 두리개보보다도 물이 흔하리라고 한다. 첫째로 수원지를 길게 올려 파면 얼마든지 샘을 얻을 수가 있고, 둘째로 물을 돌려오는 돌창 밑에 진흙을 깔면 물이 새지 아니할 것이요, 셋째로 물을 서로서로 차례를 정하여 대기만 하면 마르는 논이 없으리라고 한다.
"그러면 왜 그것을 안 해요?"
하고 묻는 내 말에 Y씨는,
"사람들이 말을 들어먹어야지요. 나오라니 나오기를 해요? 나오더라도 일을 아니해요. 사십 명이 다 나와서 제 일을 하듯 하면야 하루에 다 되지오니까. 이건, 사십 명더러 나오라면 스물도 잘 안 오고, 오더라도 노라리란 말씀야요. 그러고는 남이 애써 파서 봇돌에 물이 내려올 때 나도 나도 하고 제 논에만 물을 대겠다고 아우성을 하지오니까."
하고 쓴웃음을 웃는다.
"그럼, 물을 두고 논을 말리우는 것 아냐요?"
"이를테면 그렇지요."
"거, 어떻게 잘 해볼 수 없을까요?"
"안 됩니다. 말을 들어먹어야지요. 저마다 잘난 걸요. 민주주의고요."
Y노인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썼다. 이 노인이 아는 민주주의는 '저마다 잘나서 아무의 말도 아닌 듣는 주의'다.
Y노인의 생각에는 사람들이 말을 아니 들어먹으니 상노깨벌은 만만세가 가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아, 물을 두고도 논을 말리우는 우리 신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