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쁘다(2) - 소를 옮겨 매야
글을 쓰려고 붓을 들고 앉아서 이러한 생각에 바빴다. 안 되겠다 인제부터는 글을 쓰자.
나는 기분을 전환하려고 앉음앉음을 고친다. 이때에 우수수 하고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뜰가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난다. 서창을 아니 열어볼 수가 있는가, 서창은 바로 내가 책상을 놓은 쪽 쌍창이다.
나는 서창을 열었다. 삼각산 불암산은 빗속에 녹아버리고 바로 앞개울 건너 문재산도 묽은 숯먹으로 그린 듯하고 희미하다.
며칠 전에 핀 달리아 꽃잎이 비와 바람을 맞아서 산산이 떨어져 땅에 깔린다.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기 전에 벌써 다른 꽃이 피어서 한창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달리아의 꽃 공양은 쉬일 새가 없는 것이다.
달리아 이웃에 있는 토마토가 그 있는 듯 마는 듯한 꽃이 피었다. 남들은 순을 친다는데 나는 토마토 자신에게 맡겨버리고 말았다. 몇 가지를 치든지, 열매를 몇 개를 달든지 제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또 어떤 모양의 토마토가 열릴는지 무론 나는 모른다. 그 왁살스럽고 까닭없이 혹이 돋치고 찌그러진 열매의 모양이 생각나서 나는 웃었다.
그 옆에는 대싸리가 났다. 가만 내버려두었다. 또 그 옆에는 살구나무가 났다. 그것도 가느단 가지와 이파리가 너불너불하고 있다. 보리 타작할 때에는 살구가 익는다. 젊어서는 독한 청산을 풀어도 누렇게 익으면 그 독하던 것이 달고 향기로운 살구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나무가 자라서 살구가 섬으로 달리자면 아마 삼십 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때에 우리 우물을 파던 그 기운찬 제하도 환갑 노인이 될 것이다.
비를 맞으면서도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흰나비 한 마리에 쫓기는 알락나비가 피하다 피하다 못 하여 달리아 꽃에 모가지를 박고 흰나비의 사랑을 거절하고 있다.
비는 더 와야 하겠는데 방죽 위의 버드나무가 남으로 고개를 숙인다. 바람이 서쪽으로 돌았다가는 걱정이다. 비가 왜 이리 시원치 아니하냐고 사람들이 성화를 하고 있다. 비를 맞으며 써레를 지고 소를 앞세우고 울타리 밖으로 지나간다.
"모는 꽂아 놓아야지. 소서가 낼 모렌데."
하는 것이 농가의 속 소리다.
때까치가 소나무 중턱에 붙어서 비를 피하며 깨깨거린다. 내가 어릴 적에 살던 집 뒤란 오동나무에서 비가 올 때면 이 새가 짖었다. 깨깨깨깨, 어머니는 저놈이 제 어미를 개울가에 묻고 비만 오면 저렇게 애를 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에 들은 이름은 개고마리라 하였는데 이 고장 사람들은 그것을 때까치라고 한다.
이름이야 무엇이거나 내 귀의 기억으로는 소리는 마찬가지다. 오십 년 전 내 집 오동나무에 울던 그 개고마리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고 설사 살아 있기로서니 천리 밖에 그 늙은 몸이 나를 따라와서 내 창 밖에서 울리는 없다. 그러나 한 개고마리는 죽어도 그 종족은 살아서 같은 소리를 영원히 전하는 것이다.
장난꾼이 아이녀석 같은 옥수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고 소나무 소리가 물결 소리와 같다.
아차, 소를 옮겨 매어야 하겠다. 오늘은 다섯 집에서나 소를 빌려온 것을 모조리 거절해버렸다. 줄창 너무 오래 일을 하여서 소가 꺼칠하게 몸이 깠을 뿐더러 설사가 대단하다. 말이 통하지 못하니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어도 너무 몸이 고단한 것과 갑자기 햇풀을 뜯긴 까닭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
잔디판 위에 누운 소는 그린 듯이 있다. 고개를 들고 어딘지 모르게 바라보고 있다. 나고 자란 고향을 생각함인가. 수없이 논을 갈고 밭을 헤친 기억을 더듬음인가, 코를 꿰이고 고삐에 매인 지도 이미 오래였으니 고삐 기럭지 밖에 나갈 생각도 잊은 지 오래다. 당당한 황소이면서 암소 곁에 한 번도 못 가보고 햇풀이 길길이 자라도록 묵은 여물과 콩깍지를 먹고 목이 터지도록 멍에를 메어야 한다.
주인 없는 물가 풀판에서 마음놓고 먹고 놀고 하던 것은 그의 수백 대조 할아버지 적 일이다. 그의 집안에는 역사를 적는 이가 없으니 글을 읽어서 조상 적 일을 알 수는 없으되 어미에서 새끼에게 끝없이 전하는 그의 마음이 개벽 적부터의 그 집안 풍속을 그의 몸맵시와 함께 전하여 주는 것이다.
머리로 받는 버릇은 뿔과 함께, 새김질하는 법은 천엽과 함께, 무슨 풀은 먹고 어떤 것은 안 먹는 재주는 그의 코와 함께 받은 것이다. 뿔이 있으니 받아도 보고 싶고, 몸이 있으니 자손도 보고 싶으련마는 이것저것 다 마음대로 못 하게끔 코를 꿰인 그는 사바세계의 참는 도를 닦을 수밖에 없이 된 것이다.
조상 적부터 따라오는 파리와 등에와 모기는 어디를 가든지 그에게 묵은 빛을 내라고 재촉하고 있다. 아무리 피를 빨리고 가려움과 아픔을 받아도 그 몸을 벗어놓기 전에는 면할 수 없는 빚이다.
밤마다 내 베개에 오는 그의 한숨 소리의 뜻을 나는 안 것 같다.
-정해 유월 이십팔 일 사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