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에 넣은 글은 병술년 구월부터 금년 즉, 무자년 이월까지 사이에 씌워진 것들이다.

<산에서>는 내가 봉선사에 들어가 있는 동안의 일기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떠나서 수도생활을 할 작정으로 꽤 크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로 간 것이었다. 내가 봉선사를 숨을 곳으로 정한 까닭은 광동학교의 교장으로 있는 내 삼종 운허당 이학수(耘虛堂 李學洙)를 의지함이었다. 아이들 작문장이나 꼬나주고 영어 마디나 가르쳐주면 밥은 먹여준다는 것이었다.

운허당은 나를 위하여서 방 하나를 수리하여 주었다. 벽을 떨고 남향 창을 내어서 볕이 잘 들었고 벽장과 선반을 만들어서 선비의 한 살림을 할 만한 깨끗한 서재가 되었다. 문미에는 '茶經香'이라는 추사체로 쓴 누구인지의 액을 붙였으니, 이것은 내 방의 내용을 고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향을 피우고 경을 읽고 차를 달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석을 치기 전에 일어났고 늦어도 대허 대사의 주문 외우는 소리를 듣고는 일어났다. 나는 화롯불을 불어 일으켜서 물을 끓여서 소세하고 차를 달여먹고 아침 예불에 참예하고 방에 돌아와서 화엄경을 읽고 좌선을 하였다. 나는 적어도 백 일 동안 이 생활을 계속하리라고 속으로 결심하고 있었다. 나는 이리여 내 업장을 다 떼어버리고 한 낮의 깨끗한 수도자가 되어보려 하였다. <산에서>는 이런 생활의 시초에 쓴 것이었다.

그 밖에 것은 <내 나라>, <인생의 기쁨>, <사랑의 길> 등 세 편 서울 집에서 쓴 것을 내어놓고는 다 내 사릉(思陵) 집에서 쓴 것이다. 사릉이란 단종 왕비 송씨의 능으로 동대문에서 동북으로 사십 리쯤 되는 산골이다. 나는 우연한 인연으로 이 땅에 작은 집 한 채를 지었으니, 때는 갑신년 태평양전쟁이 마루판에 오르려 하던 때였다.

나는 여생을 이곳에서 지내려 하여 돌작밭 두어 뙈기와 소 한 마리를 사고 젊은 벗 박정호 군과 함께 농사짓기를 시작하였다. <돌베개>의 글들은 다 여기서 감흥이 나는 대로 쓴 것이었다. 나는 석벽에 적는 생각으로 이 글들을 쓴 것이요, 언제 출판될 것을 예기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 글을 쓰면 박정호 군이 그것을 소리내어 읽어주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이것으로 이 글의 목적은 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수필들은 손님 앞에 내어놓으려고 필요한 단장을 한 것은 아니요, 일상 생활의 모습 그대로다.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생활에서 때때로 느껴진 것을 슬슬 적어 놓은 것이다.

이 몇 편의 글 속에 내 종교도, 예술도, 철학도 있는가 하고 내 스스로 생각해본 일도 있다. 소리 하나만 들어도 그 짐승이 무슨 짐승인지 알 수 있다고 하면, 내 소리인 이 글 속에도 내가 아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사릉에서 한 벗과 한 소와 한 강아지와 그리고 몇 그루 소나무와 몇 포기 국화와 새들과 파리와 모기와 벌레들과 살았다. 벗은 나와 같이 어리석고 소는 누런 황소요 강아지는 검정인데 오요라고 불렀다.

우리들은 어찌어찌한 인연으로 이렇게 함께 모여 살았다. 뒤 울안에는 까치가 집을 지었고 까마귀도 와서 울었다. 여름이면 남에서 북으로 지나가는 꾀꼬리, 뻐꾸기들도 와서 울었고, 겨울이면 밤중만 하여 기러기도 울고 내 집 우으로 지나갔다. 제비도 와서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동네 사람들도 찾아왔다.



농사하고 사릉에 와 사니

벗 하나와 소 하나러라


창을 열어 산을 바라보고


귀 기울여 시내를 듣더라.



동네 나서 봇돌을 치다가


석양에 막걸리를 마시니라


종달새 새벽 안개에 울고


해오라비 비에 젖어 졸더라


오이랑 따 먹고


냉수랑 마시고


잠시 돌베개를 베고


창 밑에서 낮잠을 자니라.



이러한 것이 내 사릉 생활의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반드시 몸과 마음이 한가한 것도 아니요, 또 한가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돌작밭이니 돌도 주워야 하고 건답이니 물도 대어야 하고 아침저녁으로 소도 끌고 댕기며 풀도 뜯겨야 한다.

때로 동네 사람도 찾아오고 멀리 서울 친구들도 찾아온다. 정신적으로는 가물어 걱정, 비가 와서 걱정, 몸에 병으로 걱정, 소가 똥질을 해서 걱정, 강아지가 비리가 먹어서 걱정, 곡식에 벌레가 붙어서 걱정, 이러한 생활에도 걱정이 끊일 날은 없었다.

게다가 집안 살림살이는 날로 어려워가고 세상 일은 갈수록 시원치 못하니 마음 편안한 날이 있을 리가 없지마는 도봉과 삼각산에 떨어지는 해가 하도 좋으니 그것을 보면 내 몸이 극락에 있는 듯하였다.

나는 지난해 추수도 끝이 나고 겨울을 이 사릉서 지내려 하였다. 나는 그러께 봉선사에서 이루지 못한 마음 공부를 이 겨울에나 종종 하게 계속할까 하였더니, 신장의 고장과 고혈압으로 가족에게 서울로 끌려오게 되었다. 앓는 몸을 시골에 혼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 집에 있으면 조석으로 식구들과 만나는 낙이 있다. 아이들도 인제는 중학생이어서 이야기 동무도 되고 또 아비를 위하는 모양도 보여준다. 그러나 내 마음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언제나 끝없는 방랑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이제는 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도 찾아내어야 한다. 육십이 내일 모레가 아니냐. 게다가 병약한 몸이 아니하냐. 이 몸을 가지고 태어났던 총결산을 할 때가 가깝지 아니하냐. 날은 저물고 길은 바쁘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에 가지고 온 심부름을 잊어버린 것만 같다. 내가 무엇하러 왔던고? 좋은 청춘의 세월을 다 허망하게 보내고 백발이 성성한 오늘에 와서 호주머니를 뒤져본다는 것도 기막힌 일이다.

내가 무엇인고? 어디서 무엇하러 왔노?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는 것인고?

마치 먼 길을 가던 사람이 중로에서 술이 취하여 놀고 졸다가 번쩍 잠이 깨어보니 앞길은 막막한데 햇발은 길지 못한 것과 같다. 이에 부지런히 정신을 가다듬고 호주머니를 뒤져서 무엇하러 어디로 가던 것인가를 찾아보는 것이다.

생각하면 길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큰 어른으로는 공자님, 부처님, 예수님 같으신 이도 뵈옵고 다음가는 이들로는 노자, 장자며 플라톤, 칸트 같은 이들도 만났다. 만나서는 서럽을 들었다. 그러하는 동안에 어리석고 어두운 내 마음에도 일종의 철학이 일러졌으니 그것을 적어본 것이 <내 나라>, <인생의 기쁨>, <사랑의 길> 등, 이 책 마지막에 넣은 세 편이다. 이상에 말한 것이 이 책 <돌베개>속에 실린 짧은 글들이 씌어진 유래다.

내가 금후에 얼마나 더 살는지, 또는 어떻게 발전이 되어 무엇을 할는지 그것은 옥합에 담긴 비밀이다. 그러나 나는 얼마동안 이 몸을 가지고 더 살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길을 더듬어서 끝까지 해맬 것이다. 만일 내 생명이 허락하기만 하면 나는 <돌베개> 이후의 내 생활의 기록을 만들 것이요, 그것을 <돌베개> 모양으로 출판하여 주는 이가 있다면 아마 <돌베개> 모양으로 여러분에게 보고될 것이다.

이 책에 내는 데는 생활사 주인 오 억 형과 거기서 출판 일을 맡아보는 장기환 형의 힘이 크다. 오형은 나를 위하여 내 저서를 출판하기에 많이 근념하실뿐더러 항상 내 건강을 염려하고 생활을 도와주셨고, 장기환 군은 때때로 친절한 격려와 재촉을 주셔서 이 책의 완성을 채찍질하셨다.

나는 지나간 삼십여 년내에 수십 권의 책을 발표하였지마는 이 책처럼 참으로 내 것이다 하는 것은 없었다. 수년 전에 <춘원시가집>을 내인 일이 있었거니와 그 속에 있는 수십 편의 시조가, <돌베개> 외에는 나 자신의 속을 말한 것이었다.

넓은 의미로 보면 내가 쓴 글은 소설이거나 논문이거나 다 내 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내 인격의 설명자이겠지마는 이 수필과 저 시조만은 일점 일획이 다 내 혼의 사진이다. 과거 내 문필생활 사십 년 동안에 내 글을 읽어 주신 이는 다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이거니와 나는 이 <돌베개>를 사랑하는 내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를 삼는 바이다.

무자년 이월 삼일 서울 백악산 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