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바로 내 집 문전이 해오리가 다니는 길인가 보다. 문재산의 푸른 병풍을 배경으로 해오리가 흰 줄을 그어서 날아가는 것을 한 시간에도 여러 번 볼 수가 있다. 느릿느릿 여러 가지 곡선을 그리고 날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한가해진다.

나는 가끔 내 서창 앞 방죽 위에, 흔히 식전에 허연 것이 웅승거리고 앉았는 것을 보고 사람인가고 놀라는 일이 있다. 그것은 해오리다. 봇돌에 아침 먹이를 엿보는 것이겠지마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꼼짝도 아니하고 앉았는 것을 보면 옛 사람들이 망기(忘機)로 비기는 것도 그럴듯한 일이다. 더구나 참새가 깝죽대고, 제비가 팔랑거리고 나비들이 나불대는 것을 전경으로 하고 볼 때에 해오리는 세상을 잊은 사람에 비길 수밖에 없다.

여기도 해오리가 많지는 아니하다. 사릉의 노송도 다 찍히니 따오기, 황새와 같은 점잖은 새들이 의접할 곳이 차차 줄어간다.

"저놈 저 못자리, 밟는다."

하고 해오리도 농부의 미움을 받는 일이 있으나 원체 수가 적기 때문에 미움보다도 사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이놈, 이놈!"

하고 돌팔매를 들고 따라가다가도 너슬너슬 도롱이 같은 꼬리(그것도 꼬리라고 할까)를 늘이고 한 다리를 들고 조는 듯이 앉아있는 양을 보면 누구나 손에 들었던 돌을 살며시 버리게 된다.

해오리는 쌍으로 다닐 때는 드물다. 대개는 혼자 날아다닌다. 어디까지나 높고 외로운 선비의 모습이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열정가는 아니다. 담담한 성격이다. 까분다든가, 방정맞다든가 허욕을 부리고 싸움질을 한다든가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아니다. 그에게 기러기와 같이 만리장공을 날아 새 경지를 개척하려는 야심도 없다. 꿩과 같이 겁많고 성 잘 내는 패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부엉이나 올빼미 모양으로 의뭉스럽지도 않다.

아마 그에게 비길 벗은 오직 두루미가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두루미가 걸걸한 편이라면 해오리는 고요한 편이다. 우선 차림차림부터도 그러하다. 두루미는 아직도 이마에 붉은 장식을 하고 까만 치마를 둘러서 꾸미는 마음이 가시지 못함을 보이지마는 해오리는 이미 그러한 마음까지도 떠났다. 모든 것을 다 버린 경지다. 이른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지경에 이른 도인이다.

꾸밈없이 아무렇게나 차리기로는 솔개미가 있다. 그는 마치 누더기를 입은 행자나 선승과 같지마는 그에게는 험상이 있다. 그렇지마는 솔개미도 속태를 떠난 일종의 도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속에 불측한 뜻을 품고 슬슬 기회를 엿보는 야심가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