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김두성과 이범윤 등도 모두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미 총독과 대장으로 피임됐고, 나는 참모중장의 직책으로 피선됐다.
나와 의병들은 무기 등을 비밀리에 수송해 두만강 근처에 모은 다음, 그곳에서 큰 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당시 나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발언했다.
“지금 우리의 병력은 200~30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므로 적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아무리 바쁜 중이라도 반드시 만전의 대책을 세운 다음에야 큰 일을 꾀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단 한 번의 의거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첫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을 해야 하며 백 번 꺾여도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 대에 목적을 못 이루면 아들,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을 회복한 다음에야 그만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앞날을 대비하고, 뒷날을 준비하면서 꾸준히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나고, 급히 나가기도 하고 천천히도 나갑시다. 우리 한민족이 이렇게 모든 것을 구비하는 한편, 여러 가지 실업에도 힘쓰며 실력을 양성하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이들의 다수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의 분위기는 첫째, 권력이 있거나 돈 있는 사람 둘째, 주먹 센 사람 셋째, 관직이 높은 사람 넷째,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 여기는데 나는 이 네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쾌해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이미 내친걸음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가 여러 장교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전투에 나선 때는 1908년 6월이었다. 우리는 낮에는 엎드려 숨어 있다가 밤길을 걸어 함경북도에 이르렀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 군대와 몇 차례 충돌해 서로 간에 사상자가 생겼으며, 포로를 잡기도 했다.
나는 포로로 잡은 일본 군인과 장사꾼들을 불러다 물어보았다.
“그대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들이다. 그런데 왜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는가?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선언서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침략하고 약탈하려고 아우성이니 어찌 이것을 평화와 독립이라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역적이나 강도가 하는 짓이 아니냐?”
일본 포로들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우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본심이 아니요, 부득이한 사정으로 온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만리타향 전쟁터에서 끔찍하게도 주인 없는 원혼들이 돼 버리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에 아니라, 오로지 이토 히로부미의 잘못 때문입니다. 이토는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서 일본과 한국 두 나라 사이에 귀중한 생명을 무수히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들은 말을 끝내고 계속 통곡했다.
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