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 만 번 생각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아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혼자 말했다.

 

“나는 정말 큰 죄인이다. 내 죄는 다른 죄가 아니라, 어질고 약한 한국 국민으로 태어난 죄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마침내 의혹이 풀리고 마음의 안정도 찾을 수 있었다. 그 뒤에 형무소장 구리하라 씨의 특별소개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사형판결에 대해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후, 동양 대세의 흐름과 평화정책에 관한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감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대를 깊이 동정하지만 정부 기관이 하는 일을 어찌 할 수 있겠소? 다만 그대가 진술하는 의견을 정부에 보고하겠소.”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마움을 표하며 요청했다.

 

“만일 허가할 수 있다면,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 늦추어 주시오. ‘동양평화론’이라는 책을 한 권 집필하고 싶소.”

 

그랬더니 고등법원장이 대답했다.

 

“어찌 한 달뿐이겠소.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 마시오.”

 

나는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돌아와서 공소권을 포기했다.

 

설사 항소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은 불보듯 분명한 일일 것이고, 또한 고등법원장의 말이 과연 진담이라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때 법원과 감옥의 관리들, 내가 쓴 글을 기념으로 간직하겠다며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어주고는 글씨를 써 줄 것을 부탁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면서,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그때 천주교회 선교사 홍 신부가 나의 영원한 삶과 행복을 기원하는 성사를 해주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이곳까지 왔다. 홍 신부를 만나니 꿈과 같고, 그 기쁨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나를 다시 만나자 홍 신부는 내게 천주 교리로 훈계한 뒤에 다음날은 고해성사를 받아주었다. 또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감옥으로 와서 성제대례미사를 거행했다. 이때 나는 영성체 성사를 성스럽게 받음으로써 천주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게 됐다. 그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는 감옥에 있던 일반 관리들이 모두 함께 참례했다.

 

그 다음날 오후 2시쯤 홍 신부는 다시 내게 와서 말했다.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작별하러 왔다.”

 

홍 신부와 나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내 홍 신부는 헤어지기 위해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인자하신 천주님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거둬 주실 것이니 안심하여라.”

 

그리고 손을 들어 나를 향해 강복을 해주고 떠나니, 그때가 1910년 경술년 음력 2월 초하루 오후 4시쯤이었다.

 

이상이 안중근의 32년 동안 역사의 줄거리다.

 

1910년 경술년 음력 2월 5일(양력 3월 15일)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글을 마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