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부치 검찰관이 다 듣고 난 뒤에 놀라면서 말했다.
“지금 진술하는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의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의사이니까 절대로 사형받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대답했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의할 필요가 없소. 단지 내 뜻을 빨리 일본 천황에게 알리시오. 그래서 속히 이토 히로부미의 옳지 못한 정략을 고쳐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는 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
말을 마치자 나는 다시 지하실 감옥에 갇혔다. 다시 4~5일이 지나서 나는 여순 감옥으로 가게 됐다. 이날 우덕순·조도선·유동하·정대호·김성옥과 또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 2~3인이 결박된 채 정거장에서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출발했다.
여순에 이르러 감옥에 갇히니 때는 음력 9월 21일(양력 11월 3일)께였다.
그 뒤에 미조부치 검찰관이 한국어 통역관 소노키 씨와 함께 감옥으로 와서 10여 차례 심문했다. 그동안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검찰관의 기록 속에 상세하게 실려 있기 때문에 구태여 여기에 다시 일일이 쓰지 않겠다.
이때 한국 본토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본 경찰간부 사카이 씨가 왔다. 그는 나이가 많았고, 한국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어서 나는 날마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나는 사카이 노인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영국과 러시아 변호사가 여기 왔었는데, 그것이 법원 관리가 공평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허가해 준 것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동양에서는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해로울 뿐 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날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1910년 음력 11월(양력 12월 말)께였다. 친동생 정근과 공근 두 사람이 한국 진남포로부터 이곳에 면회를 와서 반갑게 만났다. 작별한 지 3년 만에 처음 보는 것이라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동생들과 4~5일 만에, 혹은 10여 일 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인 변호사를 요청하기도 하고, 천주교 신부에게 성사를 받도록 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그 뒤 어느 날 미조부치 검찰관이 또 와서 심문하는데, 그 말과 행동이 전과는 전혀 달랐다. 혹은 폭력을 쓰고, 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하고, 혹은 모욕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검찰관의 생각이 이렇게 돌변한 것은 아마 제 본심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큰 바람이 불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이성에 따라 바르고 참된 길로 가기는 힘들고, 감정에 치우쳐 부도덕한 길로 흐르기 쉽다더니 그것이 헛말이 아니로구나.’
이때부터 나는 내 앞날이 크게 잘못돼 공판도 틀림없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그릇된 판결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이후 말할 권리가 금지돼 내가 목적했던 의견을 진술할 도리가 없었다. 검찰관은 모든 사실을 숨기고 속이는 기색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