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 번 만 번 생각해 봐도 이유와 그 복잡한 내막을 알 수 없고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 다음날 미즈노와 가마타 두 변호사가 다음과 같은 변론을 했다.
“피고의 범죄는 분명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므로 그 죄가 중대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한국 인민에 대해서는 일본 사법관에 관할권이 없습니다.”
나는 다시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했다.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일인데 오해는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사람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 도중에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하얼빈에 와서 공격을 가한 후에 포로가 돼 지금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여순 지방재판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니,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나를 판결해야 한다.”
이때 시간이 다 돼 재판관은 모레 다시 개정해 선고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모레면 일본국 4700만 인구의 인격을 저울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인격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높은지, 낮은지 지켜보리라.’
이윽고 선고공판이 열리는 날 법정에 섰다.
마나베 재판관이 선고를 했다.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3년 징역, 조도선·유동하는 각각 1년 반 징역에 처한다.”
검찰관의 구형과 같은 형량이었다. 그리고 재판장은 공소 일자를 5일 이내에 다시 정하겠다고 말하고 더 이상 말도 없이 부랴부랴 공판을 끝내고 가버렸다. 이때가 1910년 경술년 음력 정월 초 3일이었다.
나는 감옥으로 돌아와 혼자 다시 생각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윗사람의 잘못을 간언하고 정략을 세운 것들은 훗날 역사에 옳은 것으로 기록되지 않았는가? 내가 동양의 대세를 걱정해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방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일본국 4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100년 비바람이 어느 때에 그칠 것인가? 지금의 일본 당국자에게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다면 이 같은 정략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만일 염치가 있고, 공정한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한국에 와 있던 일본 공사 미우라는 1895년에 병정을 이끌고 대궐에 침입해 한국의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했으나,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고 석방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러한 짓을 시킨 자가 분명히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나의 일을 보면, 설사 개인 간의 살인죄라고 하더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가 어느 쪽이 무겁고 어느 쪽이 가벼운가? 참으로 머리가 깨어지고 쓸개가 찢어질 일이다. 내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