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해(1906년) 봄 3월, 나는 가족들을 이끌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해 살게 됐다. 그곳에 양옥 한 채를 짓고 살림을 안정시킨 뒤 나는 집의 재산을 정리해 두 곳에 학교를 세웠다. 하나는 삼흥학교요, 또 하나는 돈의학교라 했는데 나는 학교 일을 맡아 똑똑하고 재능이 뛰어난 청년들을 교육했다.

 

그 다음해(1907년) 봄, 어떤 분이 나를 찾아 왔다. 그분의 기상을 살펴보니 위풍이 당당해 도인과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통성명을 해 보니 그분은 김 진사였는데,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본래 자네의 부친과 친한 사람이어서 특별히 찾아온 것일세.”

 

내가 여쭤보았다.

 

“선생님께서 멀리서 이렇게 찾아주셨으니,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분이 말했다.

 

“그대와 같이 기개가 높은 젊은이가 지금 이렇게 나라의 정세가 위태롭게 된 때에 어찌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려고 하는가?”

 

내가 여쭤보았다.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습니까?”

 

그분 말씀이 “지금 백두산 뒤쪽의 서북 간도와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한국인 1백여 만 명이 살고 있다네. 그곳은 물산이 풍부해 군대를 한 번 일으켜 볼 만한 곳이야. 자네는 재능이 있으니 그곳에 가면 뒷날 필히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일세.”

 

나는 말씀드렸다.

 

“마땅히 가르쳐 주신 것을 정성껏 따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인사를 한 다음, 그분은 돌아갔다.

 

그 무렵 나는 돈을 벌어볼 계획으로 평양에 가서 석탄광 채굴사업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일본인의 방해로 아까운 돈을 수천 원만 손해 보았다.

 

또한 그때 한국에서는 일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1300만 원 상당의 차관을 갚으려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이때 평양에서의 국채보상회 발기인 대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일본 경찰 1명이 조사를 나와서 내게 물었다.

 

“회원은 몇 명이며, 재물은 얼마나 모았소?”

 

내가 대답했다. 

 

“회원은 2천만 명이요. 재물은 1300만 원을 모은 다음에 국채를 모두 상환하려 하오.” 

 

그러자 그 일본인이 욕지거리를 하며 말했다.

 

“한국인같이 하등인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말했다.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으면 되고, 돈을 준 사람은 돈을 받으면 그만인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질투하고 욕질을 하는 것이냐?”

 

그러자 그 일본인은 화를 내면서 나를 때리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같이 이유 없이 욕을 당한다면, 대한의 2천만 민족이 장차 큰 압제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나라의 수치를 감수하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이어 나도 분노가 폭발해 서로 무수히 치고받았다, 마침 곁에 있던 사람들이 애써 뜯어말려서 싸움을 끝내고 헤어져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