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초 일본은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두 나라가 대포소리를 크게 울리며 싸우고 있었으므로 동양은 큰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해가 가고 달이 바뀌어 1905년 을사년이 됐다.
홍 신부는 한탄하면서 내게 말했다.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되었구나.”
“왜 그러합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가 한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될 것이요, 일본이 이기면 일본이 한국을 관할하려 들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이때 나는 날마다 신문과 잡지와 각국의 역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지나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을 예측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이 강화조약의 체결로 끝난 후,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한국 정부를 위협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강제로 맺으니, 삼천리 강산과 2천만 인심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이 불안하게 됐다.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아버지는 울분을 참지 못해 병이 더욱 위중하게 됐다. 나는 아버지와 은밀히 상의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했을 때, 일본의 선전포고문 가운데에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일본이 그러한 신의를 내팽개치고 야심적인 책략만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의 대정치가라는 이토의 정략입니다. 우선 강제로 조약을 맺고, 다음으로 뜻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없앤 뒤 강토를 삼키고 오늘의 우리나라를 망치게 하려는 것이 바로 새로운 조약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속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큰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의거를 일으켜 이토의 정책에 반대한들 우리와 일본의 힘에 큰 차이가 있으니, 부질없이 죽음만 당할 뿐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들리는 말에 따르면, 청나라 산동과 상해 등지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우리 집안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가 자리를 잡고 살다가 앞뒤의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먼저 그곳에 가서 살펴본 다음 돌아올 것이니, 아버님께서는 그동안 은밀히 짐을 꾸린 뒤 식구들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서 기다리세요. 해외에 가서 사는 일은 제가 돌아오는 날 다시 의논해 결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부자간의 계획은 정해졌다.
나는 곧 길을 떠나 산동 등 여러 곳을 두루 다녀본 뒤 상해에 이르러 민영익을 찾아갔다. 그런데 문지기 하인이 민 대감은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며 문을 닫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날은 그냥 돌아왔다. 다음날 두세 번 더 찾았으나 역시 전일과 같이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나는 민영익이 듣건 말건 문앞에서 그를 크게 꾸짖어 말했다.
“그대는 한국인인데 한국인을 만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려는 것인가? 더욱이 그대는 한국에서 여러 대를 국록을 먹던 신하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같이 나라가 어려울 때 전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누워서 조국의 흥망을 잊어버리고 있으니 세상에 어찌 이 같은 도리가 있을 수 있는가? 오늘날 나라가 위급해진 것은 그 죄가 전적으로 그대들과 같은 고관들에게 있는 것이고, 민족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굴이 부끄러워서 만나지 않는 것인가?”
한참 동안 욕을 퍼붓고 돌아와 다시는 그 자를 더 찾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