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나라의 교회는 차츰 확장돼 교인이 수만 명에 가까웠으며, 선교사 여덟 분이 황해도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나는 당시 홍 신부에게서 프랑스어를 몇 달 동안 배웠다. 그러던 중 홍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안했다.

 

“지금 한국 교인들이 학문에 어리석고 어두워 교리를 전도하는 데에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가의 장래를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합니다. 부디 서울의 민 주교에게 말씀드려 서양의 수사회(修士會)에서 박학한 몇 분을 모셔 와 우리나라에 대학교를 설립한 뒤, 나라 안의 재주가 뛰어난 자제들을 교육시킨다면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계획을 세운 다음에 홍 신부와 함께 곧 서울로 올라가 민 주교를 만나서 내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 주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만일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 데 소홀해질 것이니 다시는 그와 같은 의견을 제시하지 마시오.”

 

나는 두세 번 권고해 보았지만 그는 끝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러한 일을 당하고 보니 스스로 분개함을 참을 수 없어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을 믿지는 않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난 후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때 어떤 친구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을 중단한 이유를 물어보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다.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어를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 내가 만일 계속해서 프랑스어를 배우다가는 프랑스의 종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만둔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우리 한국말을 두루 사용할 것이니 자네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나.”

 

그러자 그 친구는 할 말이 없어 물러가고 말았다.

 

그 당시 이른바 금광 감독으로 있던 주씨라는 사람이 천주교를 비방해 피해가 적지 않았다. 내가 대표로 선정돼 주씨가 있는 곳으로 파견됐다. 그곳에 가서 그에게 사리를 따져가며 질문하고 있는데, 금광의 광부 400~500명이 각기 몽둥이와 돌을 갖고 옳고 그른 것을 불문하고 나를 두들겨 패려고 달려들었다.

 

이것이 바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경우였다. 위기에 처한 나는 달리 방법이 없어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들고, 왼손으로는 주씨의 오른손을 잡고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가 비록 100만 명 무리를 가졌다 해도,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으니 알아서 해라.”

 

그러자 주씨가 크게 겁을 먹으며 좌우에 있던 광부들을 꾸짖어 내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주씨의 오른손을 잡은 채로 그를 출입문 밖으로 끌고 나와 10여 리를 함께 간 뒤에 그를 놓아주었고 나도 무사히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