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가 다시 물을 때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김씨 일문의 의견은 좌근이 이미 대표하여 말하였으며, 다른 의견은 조두순이 말하였는지라, 별다른 의견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어느 편으로 기울어질지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 섣불리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를 모두 꺼리었다.
잠시 침묵이 계속 된 뒤에 대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가지의 의견을 들었소이다. 두 가지의 의견이 다 일리가 있는 것으로서, 어느 편을 취하고 어느 편을 버리기가 어려운 일이외다. 그러니 그 두 의견을 잘 절충해서 이렇게 하도록 하면 좋을 줄 생각합니다. 대원군은 주상 전하의 사친이매, 북면해서 신하로서 섬길 수는 인륜상 힘든 일이니, 추배하지 않고 칭명하지 않고 신사(臣仕)하게 하자는 좌상의 의견을 채용하고,
대원군이 아무리 신렬(臣列)에 있다 하되 주상 전하의 시친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임금의 사친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그 출입에는 삼군영의 병사를 두어서 시위하게 하며, 운현궁장(雲峴宮庄)을 마련토록 하고, 쌍초선을 받고 대궐 출입에는 남여를 타고 내관이 부액을 해서 전에 오르고, 그 위계는 대군의 위에 두고, 그 복제는 기린 흉배에 옥대를 쓰게 하고, 이것은 영상의 의견을 좆기로 합시다.”
조참(朝參)에는 대원군의 자리를 대신의 위에 따로 정할 것. 임금의 사친에 대한 예로서 운현궁 밖에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울 것.
삼공 이외에는 영내(楹內)에 같이 앉지 못할 것―등등 대원군의 의주에 관하여는 대략 결정이 되었다.
의주는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자격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은커녕 말도 나지 않았다. 이 자격 문제야말로 그 사이 흥선이 온갖 수단을 다 써 가면서 전후 좌우로 운동한 것이다.
은인(隱忍) 십여 년, 이제 바야흐로 떨어지려는 복덩어리를 온전히 붙들기 위하여는, 대원군의 자격 문제가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
만약 흥선으로서 단지 왕친이라 하는 허명이나 탐하고, 일신상의 영화만을 꾀하려면 지금 여기서 결정된 그 의주는 그의 그런 야심뿐은 넉넉히 만족하게 하고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야심이 단지 자기의 일신상의 안일에 있지 않고, 자기의 커다란 손을 이 나라의 국정상에 펴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흥선에게 있어서는, 허영은 오히려 우스운 것이었다.
'왕의 생친의 섭정'
아직껏 전례가 없는 이러한 명목을 붙들고자, 일변으로 정원용, 조두순 등 원로 대신을 달래고, 위로는 이 결정권을 잡은 조 대비께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승낙을 얻은 것이었다.
대원군의 의주에 관해서는 대략 결정이 된 후에 이 전각 안은 잠시 고요하여졌다. 대원군의 의주가 너무도 어마어머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 발안자(發案者)인 조두순도 오히려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라에는 두 임금을 두지 못한다 하나, 지금 결정된 의주로 보자면, 대원군의 대우도 또한 임금께 그다지 지지 않았다.
“아, 참 또 한 가지…”
잠시 침묵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이렇게 말하는 조 대비의 낯에는 분명히 흥분의 기색이 있었다. 무슨 의외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려는 것에 틀림이 없다.
“주상 전하가 유충합실 때에는 옛날 예로 말하자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격식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노파―국사 다난(國事多難)한 이 때에, 나같은 무식한 노파가 청정을 하느니보다는, 전하의 생친 대원군이 섭정을 하는 것이 어느 편으로 보든간 상책일 테니깐 그렇게 하도록 마련하시오.”
드디어 터져 나왔다. 대비의 입에서 한 마디가 나오면 나오느니만큼 더욱 높아 가는 대원군의 지위였다. 이 전대 미문의 하교에, 원로 대신들은 미처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좌근이 먼저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좌일보 우일보로서 그의 사활이 작정되는 위급한 마당이매, 생명을 걸어서라도 반대하려고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 때는 벌서 때가 늦었다. 한 마디의 거탄을 내어 던진 뒤에 대비는 재쳐,
“별다른 이의(異議)가 없는 모양이니 그렇게 작정하도록 하시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 내전에서 주상전하의 어장성이나 보고 즐기고 있겠소이다.”
말을 채 맺지도 않고 여관들을 거느리고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어느 누가 반대를 한다든가 이의를 제출할 틈도 없이 혼자서 방안하고 혼자서 작정한 뒤에, 전광석화와 같이 내전으로 몸을 피하여 버렸다.
“몰락이다! 몰락이다!”
대비가 내전으로 들어간 뒤에 좌근은 혼자서 중얼중얼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