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기는 여기서 아직껏 자기네들의 상식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온전히 타입이 다른 인물을 보았다. 동시에 그 인물이 바야흐로 펴려는 커다란 손을 보았다. 사람의 감정으로 말하는, 아직껏의 전례로 말하든, 당연히 원심을 품고 자기네를 박멸하기에 온 힘을 다 하여야 할 흥선이, 그와는 단연 반대로 도리어 나아가서 대비께 알선까지 하여 자기네들을 구원해 주려는 것을 볼 때에, 병기는 거기서 단순히 '관대심'이라든가 '동정심'이라든기 '온정주의'라든가 하는 것 밖에,
'사사로운 위혐보다는 더욱 큰 사업이 이 세상에 있으며, 그 사업을 위하여서는 구구한 사혐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위대한 마음을 보았다.
그 흥선의 큰 마음을 보고, 돌이켜서 아직껏의 자기네들의 단지 사욕 채움을 위한 암투며 살육이며 책동 등을 생각할 때에, 병기는 스스로 얼굴이 훅훅 다는 것을 금치 못하였다.
본시 어리석지 않은 병기―어리석지 않기에 또한 흥선은 그 인물을 아끼어 사혐을 모두 잊고 병기의 조명(助命)을 대비전에 품하려 하는 것이다―는, 이제 바야흐로 펴려는 흥선의 거대한 날개를 오히려 많은 호기심과 존경의 염으로 바라보고, 흥선으로서 병기를 부르기만 하면, 부족하나마 한 팔의 힘을 돕기를 아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병기와의 약속을 이행하고자, 오후에 흥선은 대궐에 들어갔다. 지금의 회견은 가난한 종친과 대비와의 회견이 아니었다. 섭정 국태공 대원군 저하(邸下)와 대왕대비전하 조 씨의 회견이었다.
“대감, 김가들을 어떻게 처치하시렵니까?”
벽두에 대비께서 김씨에 대한 말이 나왔다. 대비에게 있어서도 원한 사무친 김씨 일문, '김씨'도 아니요, '김가'였다.
“네, 거기 대해서도 어떤 하교가 계시올지 듣잡고자 입내하였습니다.”
대비는 한 순간 말을 끊었다. 준비하였던 말을 꺼내려는 예비 행동이었다.
“한 가지 길―대감, 그 사이 김가들한테 수모를 받은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립니다. 왕실의 계통이 얼마나 존엄한 것이관대, 외람되이 김 수근, 김좌근배(金洙根金左根輩)가 주둥이를 디밀어서…”
십 사 년 전, 인손이를 제해 버리고 대행왕을 강화에서 모셔 온 일에 대한 노염이었다. 흥선은 황공히 머리를 조았다.
“황공하옵니다.”
“또 이하전 옥사에, 소위 대비(헌종 홍씨)가 몸소 금부에 옥초를 보았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담이 서늘해집니다.”
“황공하옵니다.”
“이런 흉적을 대감께서 잘 처분하셔야겠소이다. 고 혜당 김수근(故惠堂金洙根)은 관을 꺼내어 참시(斬屍)를 하고 병학, 병국은 절도에 원배를 보낼 것이고, 하옥 김좌근은 선마마(선조비 김씨)의 동기이니 삭관이나 하고 생명은 그냥 두지만, 병기는 파양 원배(破養遠配) 후에 사사(賜死)를 하는 것이 지당할 줄 생각합니다.”
당연한 처분이었다. 이전과 같으면 이러한 처분은 당연한 것으로서, 지금 김씨 일문들도 그만한 각오는 하고 있을 것이었다.
듣기를 끝내고 흥선은 한참 있다가야 머리를 들었다.
“대비전마마!”
흥선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