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하십시오. 사혐으로 정사를 좌우할 흥선이 아니외다. 지금 조야를 둘러 보아야, 국가 다난하고 인재 부족한 이 때에, 대감 같은 인물을 거저 버려 둘 수 없으니, 아무 근심 말고 기다리시오. 무재 무력한 흥선이 이제 장차 국사를 조리할 때에는 대감 같은 인재의 협력이 없어야 어찌 다하리까? 아무 염려 마시고 하회 있기만 기다리시오.”
의외의 말에 병기는 눈을 들어 흥선을 쳐다보았다. 온화하고도 엄숙한 표정―아직껏의 전례로서 한 개의 세력이 서게 되면 먼젓번의 세력은 반드시 박멸을 시키는 것이어늘, 자기의 맞은편에 단연히 앉아 있는 이 인물(어제까지도 한 개의 비루한 인물로 밖에는 보지 않던)은, 어떤 심산을 가졌길래 적지 않은 위협을 진 자기에게 대하여 이런 관대한 처분을 내리나?
이 집 문안에 들어설 때까지도, 역시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않았던 병기지만, 갑자기 자기의 마음에서 생겨 나서 자라는 흥선에게 대한 위포와 존경의 염을 병기는 스스로 금할 수가 없었다.
“대감!”
이윽고 병기가 눈을 흥선에게로 굴릴 때에는, 병기의 얼굴에는 공손의 표정이 뚜렷이 나타났다.
“무엇이라 올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감께서는 그렇듯 관대히 마음을 잡수시지만, 대비전마마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실지 알 수 없습니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 사이 권력을 천단하고 조 대비께까지 감히 하지 못할 짓을 함부로 한 그들인지라, 대비가 자기네의 일족에게 대하여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흥선이 빙긋이 웃었다.
“대감도 꽤 소심하시오.”
그렇게 소심하면 어떻게 이전과 같은 대담한 일을 하였느냐는 풍자였다.
“대감, 생각해 보시오. 섭정은 이 나 흥선이외다. 아무리 대비전마마라도 섭정을 넘어서서 처분을 내리시지 못하실 줄은 대감도 짐작하실 바, 무슨 별다른 걱정을 하시오?”
“그렇지만…”
대비에게서 명령이 내릴 때에도, 능히 거기 거역하고 자기네를 보호하여 줄 수 에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아무 근심 말고 흥선을 믿으시오. 든든한 배를 탄 것같이 마음을 턱 놓고 흥선만 믿으시오. 아직껏은, 대감네들은 흥선을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흥선은 대감네들이 생각하시는 바와는 좀 달라서, 인정의 움직임을 볼 줄 아는 사람이외다. 행하지 못할 일을 장담할 경박한 사람이 아니외다. 흥선이 한 번 장담한 이상에는, 그럴 만한 자신이 있기에 하는 일이니깐 대감의 운명을 내게 맡기고 얼마만 더 기다리시오.”
무슨 자신이 있는 것과 같이 이렇게 장담하는 흥선을, 여기는 거의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우러러보았다.
좀 있다가 대궐에 들어가서 대비께 뵙고 병기의 사건을 주선하기를 흥선은 병기에게 약속하였다. 그 대신으로 병기가 돈 십만 냥만 희생하여 용동궁(龍洞宮―조 대비 사무궁―본시는 동궁 사무궁)에 부치라는 것을 권고할 때에, 병기는 혼연히 이를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겁고도 증오와 반감으로 찬 마음으로 흥선의 집을 찾았던 병기는, 거기서 나올 때는 그 불쾌한 기분을 다 삭였다, 그리고 가볍게, 흥선에게 대한 존경과 애모의 염을 가득히 품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