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인 하옥 자기가 허리를 굽히고 국왕의 생친으로서의 흥선에게 경의를 표할 때에, 흥선은 의연히 다만 한마디,

 

“수고하오.”

 

할 뿐이었다. 그 말투 그 태도는 웃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태도에 틀림이 없었다. 뿐더러, 그 때 흥선의 미간(眉間)에 나타나 있던―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기색―아직껏은 흥선으로 미루어서 하옥이 그 때 그 말을 전하면 허둥지둥 두서를 차리지 못할 줄만 알았더니, 흥선의 그 때의 태도는 가장 당연한 일을 만난 듯이, 조금도 낭패하는 기색이 없이 소년을 부르러 뜰로 내려섰다.

 

이 때부터 하옥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한 가지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흥선의 이중 인격이었다. 아직껏 비굴한 웃음을 얼굴에 띄워 가지고 기신기신 권문을 찾아다니던 것은 단지 흥선의 호신책이 아니었던가? 

 

이번에 흥선 댁에 떨어진 행운은 그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요, 그 사이 십여 년 간을 세밀한 주의 아래 계획하고 진행시켜 온 일의 오늘날의 성공이 아닐까? 더구나 이하전 역모 사건이라 하는 것도 무론 구체적으로 빚어 내기는 자기네 일문에서 한 노릇이지만, 그로부터 사오 일 전에 흥선이 하옥을 찾아서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다가,

 

“전하 천추하시는 날에는 아마 대개 이 도정이 보위에 오르게 되겠지요?”

 

이런 한 마디를 던져서, 그것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자기네는 부랴부랴 이하전 역모 사건이라는 것을 빚어 내었다. 그것이 우연한 암합이면 모르지만, 그것 역시 흥선의 세밀한 계획의 일단이라 할진대, 그 추단력, 그 지력, 그 통찰력은 사람으로서 능히 추측하기 힘들도록 놀라운 인물이다.

 

대원군을 불신례(不臣禮)로 대우할 것.

 

운현궁에는 홍마목을 세워서 궁에 입하려면 대궐의 허락을 맡도록 할 것.

 

대원군의 지위의 임금의 아래, 대신의 위에―대군(大君―王嫡子)과 동렬에 두고, 그 출입에는 삼군의 군사로 호위하게 할 것.

 

기린 흉배(麒麟胸背)에 옥대(玉帶)를 정복으로 할 것.

 

일체 정치에 간섭하지 않게 하고, 단지 임금의 생친으로서 존경하게 할 것.

 

―흥선대원군의 금후 대우에 대하여 이렇게 작정하기로 의논을 하였다. 이리하여 이 밤의 회의를 끝내었다. 그리고 원상 정원용과 좌상 조두순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서, 내일 대비 어전 회의 때에 틀림없이 이대로 결정을 짓기 위하여, 이미 밤도 깊었으나 하옥이 몸소 정원용과 조두순을 찾기로 하고 그 밤은 헤어졌다.

 

길의 순서에 의해서 하옥의 탄 평탄자가 바야흐로 조두순 댁 솟을대문 앞에 놓이려 할 때에, 대문이 삐그덕하니 열렸다. 그리고 그리고는 웬 사람이 하인에게 좌초롱을 들리고 나왔다.

 

조 대비의 조카 조성하였다. 하옥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벌써 흥선의 손이 조두순에게 펴진 것을 직각하였다.

 

“대감, 어떻게? 밤도 깊었는데…”

 

근엄하기 짝이 없는 조두순의 책상 앞에 자리를 잡으면서 하옥을 맞았다.

 

“밤도 깊었지만 내일 희정당에서 열릴 중대한 어전 회의 때문에 그 의논을 좀 하러 왔습니다.”

 

두순은 눈을 굴려서 좌근을 쳐다보았다.

 

“어떠한 의논이오니까?”

 

“다름이 아니라, 내일 일에 대해서 대감의 의견을 좀 알아보고서…”

 

“의견…우리에게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대왕대비전마마의 하교가 계오신 대로 시행할 따름이지, 신자(臣子)가 외람되이 무슨 의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