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당하신 처분이옵니다. 마마의 흉중도 모르는 바가 아니옵니다. 신도 김씨들에게 대해서 마마께 지지 않는 원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옵니다. 그러나 마마…”
눈에 그득히 눈물을 머금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뚝뚝한 어조로 말하는 흥선의 말에는 진심미가 있었다.
“김씨 일문을 극형에 한달사, 대비마마 생존 중에는 태산과 같이 동요가 없겠읍지만, 마마 천세 후의 일을 생각할 때에는 신은 가슴이 저리옵니다. 지금 궁중 부중을 막론하고 모두가 김씨들에게 신세진 자들…천 명이고 만 명이고 그 종자를 잔멸시키자면 여니와, 그렇지 못하면 불행히 마마 천세하오신 후에는 누가 김씨의 남은 뿌리를 대적하리까? 주상 전하도 전하려니와, 마마의 애질(愛姪) 성하, 영하(寧夏)는 그 때 누구를 힘입으오리까. 마마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지만, 후일의 성하, 영하를 생각합셔서 관대한 처분 계시오기를 바라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이론이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흥선이 다시 가로막았다.
“마마, 흥선은 자기의 힘을 아옵니다. 흥선의 앞에선 김씨들은, 봄날의 눈과 같이 자멸의 길을 취할 밖에는 다른 길이 없사옵니다. 관대한 처분이 계실지라도 김씨 일문은 스스로 몰락이 될 것이옵니다. 마마께서 흥선을 믿읍시고 흥선에게 대권을 주신 이상에는, 흥선의 말씀을 좇으시와 관대한 처분이 계시오면, 한 편으로는 마마의 덕을 김씨에게 내리심이 되오며, 또 한 편으로는 후일의 덕행의 표본이 될 것이오매, 잠시 노염을 잊읍시고 놔대한 처분 줍시기를 바라옵니다.”
이 이치 정연한 흥선의 의견에는 대비도 더 반대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대비가 말하였다.
“그럼 김가에게 대해서 대감은 어떤 처분을 주실 의향이외까?”
“신의 소견으론 이렇게 했으면 좋을까 하옵니다. 신 본시 낙척 시대에 병학, 병국 형제의 신세를 적지 않게 졌습니다. 금수도 또한 은혜를 알거든 만물의 영장이 어찌 잊으오리까? 신의 면을 보셔서 병학, 병국 형제를 그냥 관에 머물러 두는 것을 허락해 주십사. 하옥 김좌근은 아무리 순원왕후마마의 동기로되 무능한 노물에 지나지 못하옵고, 그 위에 하옥의 배후에는 독부 양씨가 있사오니, 실직(實職)을 깎으시고 원로의 열(元老列)에나 그냥 두는 편이 좋을까 생각하옵니다. 또 혜당은 이미 죽은 사람을 참시나 해서 무얼 하리까? 막론하시옵소서. 또 병기는…”
흥선의 얼굴에는 빙긋이 미소가 돌았다.
“신, 병기에게 대해서는 잊지 못할 원혐이 있습니다. 병기의 재간으로 보자면 공위(公位)에 두어도 부족이 없는 인물이로되 신의 사혐 또한 잊기 어려우오니, 당분간은 관을 깎고 고향 여주로 내려가 있게 하였다가, 기회를 보아서 중경(개성)이나 강화(江華)나 광주(廣州)나 어느 중요한 곳의 유수(留守)쯤으로 보내오면, 덕은 덕대로 베풀고, 인물은 인물대로 쓰고, 원혐은 원혐대로 갚는 최상지책이 아닐까 하옵니다.”
예사로이 하는 말이로되, 음성이 굵은 흥선의 말인지라 전각이 드렁드렁 울리었다.
“대감 좋으실 대로 헙시오.”
대비는 이렇게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취임을 안 하였지만, 이미 작정된 섭정 국태공―흥선의 의견은 이젠 대비의 권병으로도 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감 맏도령도, 무슨 요긴한 자리를 하나 마련하셔야겠구료.”
“네, 승후관 한 자리나 마련되면 다행일까 하옵니다.”
이것은 대비에게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승후관이란? 그래도 그럴 듯한 자리를 하나…”
“그 애 본시 명민하지 못하와, 높은 자리에 두면 도리어 자리를 더럽힐 근심이 있습니다. 전하의 동기라고 자격이 없는 높은 지위를 맡기는 것은 정사를 흐리게 하는 일―흥선이 섭정으로 있는 동안은 일호도 사사의 정의로써 사람을 좌우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이것은 벌써 옛날부터 생각한 바옵니다. 만약 그 애가 마마의 애질 성하만큼만 명민할 것 같으면, 자식에게 대한 어버이의 마음이 왜 높이 등용하고 싶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