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하고 근하고 직하고 온화한 국민은, 몸이 비록 역경(逆境)에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단지 팔자로 돌려 버리고, 웃사람에게 대하여서는 절대 복종으로 종시하였다. 지금의 이 놀라운 학정의 아래서도 이 백성들은 연하여 자기의 팔자를 혀를 차며 조반과 저녁에 분주하였다. 누구를 원망하든가 불복을 한다든가 거역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 순량한 백성이다.

 

그러나 온순함에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웬만한 곤란은 모두 팔자 소관으로 단념하여 버리는 이 백성이로되, 참을 수 없게까지 곤란이 심해질 때는 드디어 들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임술년(壬戌年) 이월에는 진주에서 드디어 민요가 일어났다. 백성들은 모두 몽치와 대창을 가지고 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진주 이방을 박살하고 병사 백 낙신(白樂辛)을 잡아 내려고 돌아다녔다. 백 낙신의 횡포가 너무도 심하여, 이 온량한 백성으로도 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 보도가 조정에까지 이르른 때, 조정에서는 망지소조하였다. 아무런 짓을 하더라도 그냥 참는 이 백성의 이번의 봉기는, 궁중만 놀라게 하였을 뿐 아니라, 대신들도 어쩔 줄을 모르도록 놀랐다. 부호군 박 규수(副護軍朴珪壽)를 안핵사(按?使)로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시켰다.

 

그런데 이 안핵사가 조정에 들어오기 전에 사월에 전라도 익산에서도 또 민요가 일어났다.

 

수천의 군중은 군청으로 달려 가서 군수 박희순(朴希淳)을 찾아 내려다가 찾지 못하고, 그 대신 박의 어머니를 찾았다. 박의 어머니를 찾아 낸 군중은 옷을 모두 찢어서 벌거벗기고 물과 비(?)를 가지고 박의 어머니의 하문(下門)을 닦으면서,

 

“이 구멍이 못되어서 못된 자식을 낳았다.”

 

고 야단들을 하였다.

 

이 보도가 조종에까지 들어온 때는 어진 상감도 종래 당신의 노염을 감추지 못하였다. 재상들 앞에서도 하고싶은 말씀도 못하고 어릿어릿하기만 하던 상감도, 이 때 뿐은 영의정 김좌근을 힐책하였다.

 

“수상, 이게 웬일이오니까? 어제는 진주, 오늘은 익산 백성에게 죄가 있는지, 방백 수령에게 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일이오니까? 모두 내가 불민한 탓일까?”

 

여기 대하여 좌근은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부호군 이 정현(副護軍李正鉉)을 안핵사로 즉시 파견을 하였다.

 

그런데 그 사월달에 또 경상도 개령(開寧)에 민요가 일어났다. 개령과 때를 같이하여 전라도 함평(咸平)서도 또한 민요가 일어났다.

 

연달아 일어나는 이 민요에 조정에서도 어찌하여야 할지 그 방책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진주 사건은 병사 백 낙신을 고금도(古今島)에 정배를 보내어 이렁저렁 결말을 짓고, 익산 사건은 군수 박희순을 벌을 하여 이렁저렁 결말을 짓기는 지었다. 그런데 그 해 동짓달에 함경도 함흥에도 또 사건이 생겼다. 민요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문제가 적지 않게 벌어져서 안핵사로 호군 이 참현(李參鉉)을 파견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서 계해년 정월에는 제주도(濟州島)에서 또 민요가 일어났다. 일 년이 못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여섯 번의 사건이 생겨난 것이었다. 위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다만 유유복종하던 이 온화하고 순한 백성의 속에도, 정도가 넘는 학정에 대하여는 맹렬히 반항하는 끊는 피가 있었던 것이다. 존경하면서도 또한 반항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네들의 기괴한 운명과 환경을 탄식하면서도, 이 백성들은 분수가 넘는 학정에 대하여는 드디어 반항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