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상의(商議)는 거듭되었다. 백성은 자기의 진심을 토로하였다. 벼슬은 고맙지만 벼슬을 하면 그 날부터 굶어야 할 지경이니, 이 딱한 사정을 어찌하리까고 사정하였다.
호방도 매우 동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호방도 머리를 수그리고 한참 생각한 뒤에, 이 난경을 모면할 묘책을 하나 강구하였다. 즉, 지금 사또는 나라에서도 매우 세가로서, 사또가 잘 주선하면, 혹은 그 벼슬을 모면 할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며칠 뒤에, 이 백성은 호방에게 삼천 냥의 뇌물과 감사에게 만 냥의 뇌물을 바치고, 그 벼슬을 모면하기로 하였다.
그 뒤부터 감사는 관내의 부민들을 차례로 불러서 이 '말 벼슬'을 시켰다. 그리고 벼슬 모면비로서 그 백성의 재산의 약 절반쯤씩을 거두어 올렸다.
마달잇벼슬―
“이제는 마달이가 없느냐?”
벼슬을 마달 사람―즉 '마달이'였다. 이 마달이를 차례로 들추어 내서 이 감사가 긁어 올린 재산이, 재임 일 곱 달 동안에 육십여 만 냥이었다. 눈 뜬 사람의 코를 베는 것과 다름이 없는 교묘한 정책이었다.
군포(軍布)라 하는 것이 있었다.
첨정(簽丁―지금 이름으로 微兵)은 상민들의 의무제였다. 상민으로 태어난 이상에는 첨정에 뽑힐 의무가 있었다.
먼저 군적(軍籍)에 등록이 된다. 그런 뒤에는 붙들리어 가서 병대에 복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 집안에 장정이 첨정에 나가게 되면, 그 뒤는 그 집안은 호구지책이 없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모면하는 방책으로 일정한 세반을 관가에 바치고 피하는 것―말하자면 첨정 모면비가 '군포'였다.
군포는, 베 두 필이든가, 돈 넉 냥이든가, 쌀 열 두 말이든가, 이러한 것이 원 제도였다.
그러나 첨정의 제도에 일생에 한 번이라든가 일 년에 한 번이라든가 하는 제한이 없었다. 이 점을 악관들은 악용하였다. 그 집안이 돈냥이나 있는 백성이면, 일년에 두 번 세 번 첨정에 넣었다.
뿐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일정한 액수를 작정하여 제정한 바이지만, 차차 흐리게 되어서, 되는 대로 그 집안의 재물을 압수하여 가게 되었다. 소고 말이고, 반닫이고 무엇이고를 막론하고 쓸만한 물건이 있으면 거두어 갔다.
그 위에 첨정에는 나이의 제한이 없었다. 이것 역시 악관들의 이용하는 바가 되었다. 늙은이, 어린애를 막론하고 돈냥이나 있는 집안에 사내라고 생긴 것이 있기만 하면 군포를 징수하였다.
무론, 억지로라도 피하려면 피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어린애게 무슨 군포냐고 억지로 거절하려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절하였다가는 이 뒤에 반드시 무슨 다른 벌이 그 집에 내렸다. 그리고 그 때 내리는 벌은 군포 징수의 몇 곱이 되는 혹독한 종류의 것이다.
그런지라, 뒤가 무서워서 할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이 악제도에 복종하는 것이다. '불알이 원수'라는 유명한 속담이 이 때 생겨난 말이었다. 그것 있기 때문에 이 곤경을 겪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집에 사내가 나면 그것을 관가에는 감추어 두었다.
놀라운 악정이었다. 상납미(上納米)를 벗겨 먹는다. 환곡미(還穀米)를 속여 먹는다. 경주인(京主人), 영주인(營主人)이 가운데서 잘라 먹는다. 그 고을에 좀 낡은 정자나 누각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각호에 얼마씩 거두어서 벗겨 먹는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 핑계를 만들어 내어 가지고는 벗겨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