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년에서 임술년에 걸쳐서 정치의 타락은 극도에 달하였다.
태조 건국한 이래 근 오백 년 간, 이 때만큼 정치적으로 타락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 권도를 잡은 김씨 일문은, 자기네의 세력을 그냥 유지하기 위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자기네들의 지금 권세의 근원되는 상감께 후사가 아직 없고, 그 위에 건강은 나날이 쇠약하여 가는지라, 언제 세상이 뒤집힐지 알 수 없으므로, 뒤집히기 전에 넉넉히 준비하여, 뒤집힌 뒤에도 낭패가 없게 하려고 전력을 다하였다.
세상은 어수룩하였다. 세상은 그들의 내막을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그들의 세력이 천만 년이나 가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갖 일을 그들에게 힘입으려 하였다.
김병기는 날래고 꾀 많은 사람이었다.
병기의 집에 드나드는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원모(元某)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병기는 특별히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원모는 사람됨이 착하고 꾀 없는 사람이었다. 꾀만 있는 사람이면 병기에게 그만큼 총애도 받는지라, 벌써 누만의 재산과 권력을 얻어 잡았을 것이로되, 직하고 꾀없기 때문에 매일매일 구차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병기로서 마음에만 있으면 원모를 어떤 고을의 수령쯤으로나 보내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병기는 원모의 인물됨을 잘 아는지라, 수령으로 보낼지라도 역시 꾀 없고 직한 원모는, 구차히 멋적게 지내기나 헐 것을 짐작하므로 그냥 버려 두었다.
어떤 날, 병기의 집에 무슨 연회가 있어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 있을 때였다. 병기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원 아무개, 원 아무개!”
불렀다. 그리고 들어온 원모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쳤다. 원모는 가까이 이르렀다.
중인이 보는 앞에서 병기에게 친히 불리어서 가까이 가는 것만 해도 여간한 우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병기는 원모의 귀를 끌어다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였다.
“여보게, 내 오늘 밤 자네 자당 찾아가네.”
음담이었다.
마음이 직한 원모는 벌컥 성을 냈다.
“대감, 그게 무슨 말씀이오? 철 없는 소리를…”
얼굴을 검붉게 하여 가지고 원모는 소매를 떨치고 그만 제 집으로 돌아갔다.
원모가 돌아간 뒤에 병기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하인을 연하여 원모의 집에 보내서 노염을 끄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모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 소문이 퍼졌다.
―병기가 많은 사람 앞에서 원모를 가까이 불러서 귓속말로 무슨 부탁을 하였다. 그러매 원모는 그것을 거절하고 돌아갔다. 돌아간 원모를 병기는 연하여 하인을 보내어 달랬다. 그러나 원모는 종내 듣지 않았다.
―이런 소문이었다.
그 다음부터 가난하고 직한 원모의 집에는 매일 '청대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병기의 청을 거절하고, 또한 거절당한 병기가 도리어 미안해하는 것을 보매, 원모는 병기에게 여간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라―이런 견해 아래서 원모의 집은 '청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장마당같이 되었다.
이리하여 김병기는 귓속말 한 번으로, 고지식하고 돈벌 줄 모르는 원모를 저절로 앉아서 돈이 생기게 하여 주었다.
이것은 병기의 슬기로운 성격을 말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또한 당시 병기―뿐만 아니라, 김씨 일문의 세도가 얼마나 당당하였는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김씨 일문의 일거 일동의 반향은 이만하였다. 진실로 밝은 하늘조차 흐리게 할 만한 세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