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있어서 가장 업적(業績)이 많았다는 수령 방백은, 가장 많이 벗겨 먹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상관이 벗겨 먹노라면 그 수하에 달린 많고 많은 속관들이 또한 그만큼 벗겨 먹는 것이었다. 한 상관이 십만 냥을 벌었다 하면, 속관들이 먹은 것까지 합하면 이십 만냥은 넘을 것으로서 백성의 곤란은 그만큼 컸다.
이렇게 오중 육중 칠중 팔중으로 벗기우는 백성들은, 이 학정 아래서 허덕허덕 그들의 삶을 계속하였다. 한 마디로 크게 고함도 치지 못하였다. 고함을 칠지라도 들어 줄 위(上)가 없는 가련한 백성들이었다.
위로는 삼공 육경으로부터 아래로는 말청의 천리(賤吏)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백성을 좋은 봉(鳳)으로 여기고 벗겨 먹기만 위주하지, 굽어 보고 보호하여 주려는 어진 상관을 못 가진 이 가련한 백성들은, 숨 한 번 못 쉬며 숨이 박혀서, 가들의 가늘고 참혹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백성의 위에는 아직껏 인군(仁君)이 임하여 본 적이 적었다. 여러 분의 명군은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임금은 진실로 드물었다. 놀랄 만한 문치(文治)의 업적을 남긴 세종이며, 국토 확장에 그 거둠이 적지 않은 세조며, 모두 현군이며 명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런 분들의 큰 업적까지라도 겨우 향대부의 위에까지 미쳤지, 그 이하의 백성에게까지 미친 적이 적었다. 그런지라, 이 나라의 백성들이 자기네의 통치자에게 가지는 바 관념은 지극히 모호하고 약한 것이었다.
옛날 단종이 선위를 하고 세조가 등극할 때에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고 이 방계(傍系)의 임금―좀더 혹심하게 말하자면 탈위한 새 임금을 묵묵히 맞고 그 아래 공손히 복종한 백성이었다.
그로부터 세 대 더 내려와서 제 구대의 임금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오른 뒤의 일이었다.
연산군은 무론 많은 선비를 죽였으며 음탕한 일을 많이 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이씨 수백 년 간에 연산군보다 더 많이 선비를 죽이고 더 많이 황음하였던 임금이 없는 바가 아니다. 더구나 연산군의 그 모든 정도에 어그러진 행동은, 어떻게 보자면, 횡사한 당신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행동으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연산군의 아드님이 그 다음의 위를 잇고―이리하여 전면히 내려왔으면, 연산군은 지금은 연산군이 아니라 무슨 종(宗)이든가 무슨 조(祖)로서 역사상에 뚜렷이 여러 가지의 업적이 특필되었을 것이다. 왜? 연산군은 정당한 왕통이거니, 연산군을 배반하는 사람은 당연히 역적일 것이다.
그러나 일이 순조로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연산군 제위 십 이 년 뒤에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의논을 하고 임금을 폐하기를 도모하였다. 말하자면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는 역모였다. 그리고, 그 일이 성공이 되어 진성군(晋城君)이 영립되어 신왕이 되었다. 소위 중종(中宗)의 반정이었다.
일이 성공이 되었기에 무론 '반정'이라 하는 빛 좋은 명색이 붙었다. 만약 실패로 돌아가기만 하였더면 역모로 모두 함몰했을 것이다.
이 놀랄 만한 역모의 성공에 대하여서도, 이 백성은 눈 까딱 아니 하고 방관하였다. 역모가 실패로 돌아갔을지라도 이 백성은 역시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왕위는 왕족이 잇(繼)는 것―
이런 평범한 생각으로서 백성은 이 변동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이 사건도(역사의 이면이 증명하는 바에 의지하건대) 결코 연산군의 실정을 들추어 낸 것이 아니고, 단지 재상들의 권력 다툼에 연산군이며 중종 대왕이며는 그 한 역할을 맡은 바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몇 대 더 내려와서 또한 광해군(光海君)의 사건이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같이 황음하지도 않았다. 단지 신하들을 지배하기에는 시대가 험악했기 때문에, 그의 재위 십 오 년 간은 대북(大北)과 서인(西人)의 굉장한 당쟁(黨爭_으로 종시하다가, 이 당쟁의 결말로서 소위 '인조(仁祖)의 반정'이 생기게 되었다.
말하자면 몇 대 전의 '중종의 반정'과 꼭 마찬가지로, 놀라운 역모 사건이 여기서 또 다시 성공이 된 것이었다. 선왕을 위하여 떨구어 군(君)으로 강봉하고, 종친 중의 한 사람이 위에 오른 것―말하자면 왕위 찬탈이었다.
그러니 이 때의 왕위 찬탈에 있어서도, 이 나라의 백성은 역시 이전 연산군의 때와 꼭 마찬가지로 아주 냉담한 태도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