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의 반정은 곧 뒤를 이어서 또한 이괄(李适)의 난이 있었다.
인조의 반정에 그 일등공은 이괄에게 있었는데, 그는 논공행상(論功行賞) 때에 일등공에 들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서 거기 불평을 품었었는데, 그 가운데는 또한 이간하는 무리까지 있어서, 이괄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나라에 등장을 들었으므로, 그 때문에 나라에서는 이괄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이괄은 비로소 자유행동을 취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몰아 가지고 일사천리의 세로 서울을 짓부쉈다.
신왕 인조는 놀라서 신하들을 거느리고 공주로 피하고 서울은 이괄의 세력 범위 아래 들어갔다. 서울에 입성을 한 이괄은 선조의 열째 아드님이요 선왕 광해군의 동생되는 흥안군(興安君)을 모셔서 왕으로 추대를 하고 새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일이 여기서 그쳤으면 무슨 '흥안군의 반정'이라 하고, 인조는 그 이름조차 역사상에 올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괄의 반정(혹은 반란)에 대하여도 이 나라의 백성은 아주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또 임금을 추대하게 되거니 이쯤 생각하고 열심히 신왕 환영의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주로 난을 피한 인조의 신하들이 군사를 몰아 가지고 다시 왕위 회복의 난리를 일으켰다. 이 난리에 있어서 이괄 일파가 이겼으면 '인조의 반란'이라 일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이괄이 참패를 하여 서울을 내어 버리고 달아나다가, 이천(利川)에서 자기의 부하에게 죽은 바 되고 다시 인조 복위의 세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괄의 것은 '반정'이 아니고 '반란'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머리가 어지럽도록 왕위가 변동될 동안도, 이 나라의 백성은 아주 무관심히 이를 보았다.
―웃사람은 웃사람.
―우리는 우리.
이렇게 갈라 붙이고 거기 대하여 참견을 하든가 간섭을 하든가 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자기네의 조반과 저녁에 분주하였다.
이 백성의 의견을 듣자면, 웃사람은 웃사람이요, 자기네는 아랫사람이거니, 무엇이든 명령을 하면 복종할 것이요, 또한 웃사람대로 존경을 하면 그뿐이지, 서로 아무 유기적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껏 자기네들을 사랑해 주는 인군(仁君)을 가져 보지 못한 이 백성에게는 웃사람에게 대하여는 당연히 바쳐야 할 존경의 염밖에는, 친애라든가 애모라든가 하는 관념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자기네 집 광의 쌀 항아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기네들의 쌀 항아리들을 긁어 가는) 웃사람에게 대하여 친애의 염이 생겨날 까닭이 없었다.
그런지라, 이 백성에게 있어서는 웃사람의 심부름꾼인 수령 방백들에게 대한 관념도 아주 담박한 것이었다. 웃사람의 심부름꾼이라 하는 노릇이거니 한다. 이 이상 별다른 관념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유유복종'―이것이 이 백성의 유일의 모토였다. 하라는 대로 하고―하기 싫으면 몰래 피하고―그뿐이지, 소위 거역을 하여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