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여 성하를 내보낸 뒤에, 대비는 최씨를 불렀다. 그리고 갈아 입을 의대를 가져오라 분부하였다. 최씨는 분부에 의하여 즉시 옷을 가져왔다. 그러나 대비는 곧 갈아 입으려 하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한 지금이었지만, 오늘 일을 위하여 의논하여 둔 흥선의 지혜를, 대비는 지금 힘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갑자기 다닥친 일이거니, 어떻게 처치를 해야 하며 어떻게 사건을 진행을 시켜야 할지, 흥선과 한마디의 의논을 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시간을 보내려 부러 옷도 곧 갈아 입지 않고 꿈질거리고 있었다.
승전빛은 연하여 대비전으로 달려 왔다. 갑자기 당한 이 일에, 재상들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종실의 어른되는 대비의 처단을 받들고자, 승전빛을 들여보내서 대비의 출어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방책이 아직 서지 못한 대비는, 이제 나간다 이제 나간다 하여 승전빛을 모두 그냥 돌려 내보내고 하였다. 귀를 기울이면, 겨울 바람 소리에 섞여서 궁인들의 애곡성도 벌써 여기까지 들려 온다. 그것을 들으면서 대비는 천천히 옷을 갈아 입으며, 어서 흥선이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이 종실의 최고 권위인 대비―공공히 흥선을 불러서 계획을 세울지라도, 뉘라서 머리를 가로 저을 사람이 없는 신분이었다.
가마를 몰아 가지고 흥선 댁으로 달려 간 성하는, 누구를 부르지도 않고 대짜로 흥선의 정침으로 뛰쳐 들어갔다.
“대감!”
“어?”
흥선으로는 희귀한 일―무슨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흥선은 이 침입한에게 눈을 크게 하였다.
“대감! 국상 났습니다. 어서 납세요.”
흥선은 눈을 성하에게로 굴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오히려 온화한 음성이었다.
“전하께서 대조전서 승하하셨습니다. 어서 대비마마께 들어가 뵙고…”
흥선은 알아 들었다. 한 순간 몸을 흠칫하였다. 그런 뒤에 자기의 흥분을 삭이렴인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잠시 앉아 있다가. 흥선은 고요히 몸을 일으켜서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그래서 대비마마께서 나를 부르시던가?”
“네, 어서 잠시 들어오십사고…”
“알았네. 나는 안 들어가는 편이 낫겠지. 공연한 오해를 살 필요가 없으니깐―대비마마께 들어가서 어보(御寶)를 얼른 간수하시라고―다른 손이 닿기 전에 어서 간수하시라고―나는 내일이고 모레고 조용히 들어가 뵙겠네.”
성하는 눈을 들어서 흥선을 보았다. 그러나 들던 눈을 도로 곧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랫목에 단정히 앉아 있는 그 인물―그것은 그 사이 늘 성하와 함께 술을 먹고 색항에 출입을 하던 그 흥선이 아니었다.
거대한 충동이 그의 마음에 생겼을 지금에 있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 인물―지금 마음 속에는 어떤 배포를 꾸미고 있길래, 이런 비상한 경우에 다른 사람 같으면 순간을 유예하지 않고 대비께 달려갈 이 때에, 자기는 내일이나 모레쯤 들어갈 테니, 어서 다른 것은 그만두고 어보나 간수하기를 부탁하고 있나?
성하가 흥선의 집에서 나와서 다시 대궐로 들어가려고 몸을 가마에 실을 때에, 저 편에서 한 무리의 소년들이 연을 날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보매, 그 가운데는 흥선의 둘째아들 재황 소년도 바야흐로 자기의 다홍치마를 올리려고 얼레를 어르고 있는 즈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지금 연을 올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그 소년의 위에, 이제 수삼 일 내로 떨어질 거대한 운명의 그림자를 생각할 때에, 성하는 멀리서나마 뜻하지 않고 그 소년에게 허리를 굽혔다.
―올리십시오. 하늘 끝까지 올리십시오. 지금 바야흐로 올라가려는 당신의 운명과 같이, 높이 높이 하늘 닿은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