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보를 받들고 돌아가는 이 대비의 양을 김씨 일가들은 모두 닭 쫓던 개 모양으로, 눈이 퀭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임금의 붕어를 통곡할 줄도 잊어버리고, 마치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이리하여 국왕의 권위를 자랑하는 옥새는 대왕대비 조씨의 손으로 들어갔다.
즉일로 국상은 반포되었다. 비록 재위 중에 후세에 남길 만한 특별한 시경은 없었으나, 십 사 년 간을 삼천리 강토에 군림하였던 임금의 붕어에 대하여, 온 국민은 흰 갓과 흰 옷과 흰 신으로 조의를 나타내었다.
그 날 밤 차디찬 동북풍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흥선도 백립을 마련해 쓰고 대비께 뵈려고 대궐로 향하였다.
금호문까지 이르러서 거기서 나오는 김병기의 행차와 마주쳐서, 얼른 외면을 하고 그저 지나가 버렸다. 아직 장래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찰나에, 대궐 문에서 병기를 만났다가는, 약빠른 병기에게 기수를 채이고, 기수를 채이면 일이 어떻게 뒤집힐는지 알 수 없으므로 피하여 버린 것이었다.
혹혹 쏘는 찬 바람에 팔짱을 깊이 찌르고, 금호문을 지나서 대궐 담을 끼고 거의 사원전 앞에까지 갔다가 다시 금호문 쪽으로 돌아서서 왔다. 그러나 흥선이 바야흐로 궐 안에 들어가려 할 때에, 궐에서는 또한 무리의 사람이 밀려 나왔다. 비껴 서면서 보니 왕비의 오라버니되는 병필이었다.
“음, 재수 없군!”
두 번이나 들어가려다가 들어가지 못한 흥선은 드디어 발을 돌이켰다. 재수 없는 이 밤은 그냥 지나고, 밝은 날 다시 틈을 얻어서 들어가서, 천천히 대비와 선후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집으로 발을 돌이켰다. 거대한 운명의 열매는 지금 자기의 눈 앞 삼 척 되는 거리에 늘어져 있다. 이제는 손만 한 번 내밀면 넉넉히 딸 수가 있다.
제 속 가진 사람으로는 능히 참을 수 없는 온갖 수모요 멸시를 쓰다 하지 않고 받아 오면서,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 비굴한 웃음을 억지로 웃어 가면서 지난 십 여 년의 날짜의 기억이, 벌꺽벌꺽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본시 어버이에게 받아서 타고난 조급한 성미, 노염 많은 성미―이것을 모두 감쪽같이 감추고, 자기의 인격을 가식하느라고 쓴 그 애는 얼마나 컸던가? 지금 이 노력의 열매는 바야흐로 익었다.
자기의 일거수면 넉넉히 따서 주머니에 넣을 수가 있다.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김병기에게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받고도, 억지의 웃음으로 자기의 감정을 속이지 않을 수 없던 과거―생각하면 얼굴에 피가 솟아오르는 노릇이었다. 불끈 쥐어지는 주먹을 슬며시 도로 펼 때마다, 남 모르는 피눈물을 얼마나 속으로 흘렸던가? 그러나 그 때에 용하게 참은 덕택으로 자기의 생명을 곱게 보전하여, 이제 영광스런 열매를 눈 앞에 보는 오늘을 맞게 되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서 어두운 거리를 걸을 때에 흥선은 추위도 감각하지 못하였다. 습관상 팔짱은 깊이 찔렀으나, 쏘는 바람도 그의 속까지 침범하지 못하였다.
눈을 들어서 둘러 보매, 새까만 밤의 장막에 감추인 고요한 장안―지금 한 임금을 잃고 새 임금(누구인지 지금은 짐작도 가지 않는)을 맞으려는 장안―그 아래는 무수한 창생이 겨울의 아랫목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위에 복을 주고 그들을 위해 안락을 줄 자는…”
아아! 어제까지도 자기의 술친구요 투전 동무이던 이 시민들―수백 년 간의 악정 때문에 머리를 들 기운도 없는 이 백성들―이 친구, 이 시민, 이 백성들에게 복을 주고 안락을 줄 자는, 그들의 이해자요 또한 가까운 장래에(십상 팔구) 이 나라의 왕의 왕이 될 자기 밖에는 없다.
겨울의 혹독한 바람을 받고 그 때문에 찡그러지려던 흥선의 얼굴은 도리어 이 때에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멀리서 헛개 짖는 소리가 났다.
조 대비와 흥선의 밀의―
대비는 흥선의 내어 놓은 종이를 받아 들고 묵묵히 보고 있었다.
“대비전마마, 아드님을 두시고도 절사(絶嗣)가 되오신 익종 대왕의 대를 이번 기회에 부활시키도록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