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댁에서 대궐로, 대궐에서 원로들의 댁으로, 엉덩이를 붙일 겨를이 없도록 돌아 다니는 성하로되, 그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어서 날이 지나서 정식으로 신왕이 결정되고, 그뒤에 또한 전무(前無)한 제도―국왕의 사친(私親)의 섭정(攝政)의 날이 나타나기를 마음 조이며 기다렸다.
이리하여 꿈결같이 닷새가 지나고 드디어 열 사흗날이 이르렀다. 대비의 앞에서 새 왕을 결정할 중대한 회의를 여는 날이었다.
창덕궁 희정당―대왕대비 어전 회의―
발 뒤에는 오늘의 절대 권리자 조 대비가 여관 여섯 명을 거느리고 임하였다.
순원왕후와 대행왕비의 두 분 김씨의 일문을 대표하는 김좌근, 감흥근, 김병기, 김병덕, 김병필, 김병학, 김병국의 모든 김족이며, 헌종비 홍씨를 대표하는 홍순복이며, 원로로 정원용, 조두순 등, 그 밖에 홍안 소년 한 사람이 끼어 있는 것이 이채였다. 조 대비의 조카 성하였다.
몸은 한 개의 승후관에 지나지 못하나, 오늘의 최고 권위자인 조 대비의 조카며, 흥선과 대비에게 중대한 역할을 맡은 성하는, 대비 임어와 함께 대비의 뒤를 따라서 들어온 것이었다. 같은 외척이요, 헌종의 외사촌 동생이요, 종실의 어른 조 대비의 조카로되, 김씨 일문의 세력에 눌려서 겨우 승후관 한 자리로써 명맥을 보전하여 오던 성하는, 오늘은 조 대비의 일족을 대표하는 당당한 척신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임한 것이었다.
“대왕대비전마마, 막중막대한 일이옵니다. 마음에 계오신 대로 하교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원상 정원용이 끓어 엎디어 아뢰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먼저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들읍시다.”
냉정한 대비의 말이었다.
오십까지 시어머님 대왕대비 김씨를 섬기며 자기의 온갖 감정을 감쪽같이 감추기에 단련된 조 대비는, 이런 때에 임하여서도 냉정한 한 마디를 먼저 던져 보았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대신들의 의향은 즉시 나오지 않았다. 무론 어떠한 의향은 있을 것이로되, 국면이 어떻게 전환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 덜컥 자기의 의견을 먼저 말하기를 꺼리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면 거기 반대를 하든가, 찬성을 하든가 하여 비로소 자기의 의향을 말할 예산으로, 모두 묵묵히 남의 입만 바라보았다.
이번엔 조두순이 아뢰었다.
“대왕대비전마마, 이 일은 신 등의 의향뿐으로 결정하지 못한 중대한 일이옵니다. 마마의 심중에 곕신 대로 하교해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잠시 있다가 겨우 입을 연 때는, 오십이 훨씬 넘은 대비의 얼굴에도 약간 붉은 흥분이 돌았다. 이제는 수속상 대신들의 의향을 물었는지라, 남은 것은 대비 당신의 의향을 말할 과정이었다. 말을 꺼낼 때는 대비는 음성조차 약간 떨렸다.
“대신들의 의향이 그러니, 그럼 내 뜻을 말하리다. 국정이 어지럽고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금, 한 때도 국왕 없이는 지내지 못할 테니,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재황이를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서, 이미 절사된 익종 대왕의 대통을 부활하게 하도록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