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의 편지로써 벌써 마음이 돌아선 조두순은, 대비의 말에 이의를 제출하는 김좌근을 도리어 잘못하였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은 어디 좌찬성의 의견을…”
“신은 반대하옵니다. 우리나라에 본시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사온데, 흥선군의 둘째도령을 영립하오면 흥선군의 대우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왕 이상의 존위는 없는 바오매, 왕도 아니며 신하도 아닌 흥선을 마련할 자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흥선군은 허튼 바탕에 드나들고 허튼 사람들과 교제를 하와, 명문답지 못한 언행이 많으와 왕친으로서의 재목이 못 되는 인물이옵니다.”
사활의 분기선이었다. 만약 흥선의 둘째도령을 영립하고 흥선으로서 권세를 잡게 하였다가는, 자기의 지위는커녕 생명까지 위태로운 병기는 악을 써 가면서 반대를 하였다. 김문의 군자(君子)인 유관 대신 김흥근(遊觀大臣金興根)이며, 그 아들 병덕이며, 흥선과 비교적 가까이 사귄 병학, 병국의 형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차례로 의견을 다 물은 뒤에 대비는 고요히 입을 열었다.
“여러 원로 대신들과 의견은 다 들었소이다. 혹은 가하다 하고 혹은 부하다 해서 대신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못하나, 의견을 물은 것은 단지 참고하고자 물은 뿐, 승통에 대해서는 내 이미 마음으로 작정한 바이니 그리 아시오.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도령 재황을 익성군으로 봉해서 익종 대왕의 대통을 잇도록!”
최후의 거탈은 드디어 던져졌다. 재상들에게 그 가부를 묻는다면 이어니와, 이미 대비가 스스로 작정하였다 하는 이상에는 움직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 거탄은 김문의 권세로써도 어찌하지 못할 종류의 거탄이었다.
정원용이 한 무릎 앞으로 다가 앉았다.
“대왕대비전마마, 분부는 받자왔습니다. 그러나 구전뿐으로는 후일의 증빙이 되지 못하니, 언교(諺敎―한글교서)를 내려 줍시기로 아뢰옵니다.”
대비는 여관을 돌아보았다. 한 사람의 여관이 조금 발을 들었다. 언교를 싼 붉은 보를 받들고 있다. 다른 여관이 발 아래로 그것을 내밀었다. 미리 준비되었던 것이었다. 도승지(都承旨) 민 치상(閔致庠)이 무릎걸음으로 나아가서 언교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원상 정원용에게 바쳤다.
“흥선군의 둘째아들을 익성군으로 봉하여 익종의 대통을 잇게 하라.”
재상들이 차례로 언교를 본 뒤에, 도승지 민 치상이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읽었다.
“대비전마마, 틀림이 없사옵니까?”
“없소이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언교는 이미 내리고, 그 언교가 도승지의 손으로 넘어간 이상에는 이젠 움직일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