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에게서 예에 의지하여 행차를 좀 빌어 달라는 편지가 왔다. 여러 번째 보는 일이라 영어도 행차를 갖추어 흥선에게 보냈다. 행차를 보낸 것은 오정이 좀 지날까 말까 하여서였는데, 그 행차는 저녁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의 말을 듣건대, 그 날 흥선은 대궐에 들어갔었다 한다. 배행으로는, 조성하가 있었다 한다. 정일품 현록대부의 정장을 하였다 한다.

 

영어는 먼저 머리를 기울였다.

 

기괴한 일이었다. 흥선이 대궐에 들어갈 일이 없다. 어명으로 부르셨다 하면 영어 자기가 모를 까닭이 없다. 어명이 아닐진대 정장으로 대궐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흥선이었다.

 

이튿날 영어도 입궐한 기회에 내관에게 물어서, 흥선이 조 대비께 뵈옵고 장시간 무슨 밀의를 하였다는 것을 알고, 영어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이 놀랐다. 대궐 안의 규율로서 흥선이 제 아무리 종친이기로, 흥선의 뜻으로 대비께까지 가까이 가지 못했을 것은 정한 이치다. 대비의 권병으로서 대비가 흥선을 부르기 전에는, 흥선이 백주 공공연히 대비께 가까이 가지 못할 것이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영어는 가슴이 송구하였다.

 

'조 대비와 흥선의 접근'

 

때가 때였다. 조 대비를 꺼리기 때문에 이하전이를 없이한 꼭 이 때, 흥선이 조 대비의 부름으로 입궐한 것이었다.

 

단지 한 개의 우합(偶合)적 사실로 볼까?

 

그렇게 볼 수는 도저히 없었다. 조 대비는 혹은 종친의 한 사람으로서의 흥선의 이름은 기억할지 모르나, 대궐로까지 부를 만큼 친히 알 까닭이 없었다. 만약 친히 안다하면 이전에는 부른 일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합적 사실이 아니다. 더구나 그 날(가난에 쪼들리어 변변한 도포 한 벌도 없는 흥선이) 새로 지은 관복을 차리고 위의 당당히 입궐하였다 하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흥선의 인물됨을 잘 알고, 겸하여 흥선의 지금의 가식적 인격을 간파하는 영어에게 있어서는, 이번의 조 대비와 흥선과의 회견이라 하는 것을 결코 무의미하게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영어는 몸을 떨었다. 아직껏은 흥선이 단지 목숨을 도모하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 난행을 하거나 하고 그것을 동정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층 더 깊이 세상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어 나아가면서, 그 이면으로는 궁중의 어른 조 대비와 결탁하고 놀라운 음모를 꾀하던 것을 명료히 직각하였다.

 

대궐에 조 대비를 뵙고 나온 뒤로부터는 흥선의 난행이 예전보다 십 곱 이십 곱 더 하여 가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릴 때에, 영어는 그 의의를 알고 더욱 두렵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영어의 취할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자기네의 일족에게 흥선의 가면을 폭로시켜서, 흥선을 또한 이하전과 같이 처치하여 버릴까 하는 길이었다. 또 하나는 모든 것을 눈감아 버리고, 끊임없이 그냥 흥선과의 교제를 계속하여서, 이 후 세상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흥선에게 신임을 받을 준비를 해 둘까 하는 길이었다.

 

몸집이 큰 사람은 어리석다 하나, 영어는 몸집이 큰 비례로 비교적 영리한 사람이었다. 영어는 첫째 길의 위태로움을 알았다.

 

며칠 전에도 그 이야기가 났었지만, 이제 영어가 자기네의 일족에게 대하여,

 

“흥선은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사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외다. 흥선은 무서운 배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외다.”

 

하고 말한댔자, 일족은 용이히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백 걸음을 물러서서 일족이 그 말을 믿게 된다 할지라도, 흥선은 이하전과 같이 손쉽게 처치하기가 매우 곤란한 사람이었다.